일상2021. 5. 3. 12:35

 

 원래 포스트 제목에 날짜 붙여서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분간은 날짜가 없으면 내가 매일매일 글을 썼는지 안 썼는지 헷갈릴 테니까 일단 붙이기로 했다. 나는 매년 다이어리를 써 왔고 꾸준히 채우지는 않았을지언정 매년 그 해의 다이어리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난 다이어리 중 제일 오래 된 물건이 약 15년 정도 지난 물건이니까 이 정도면 꾸준히 일기를 써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올해는 다이어리가 없다. 시험 준비를 위해 플래너를 하나 사긴 했는데 제대로 쓰질 않고 있다. 올해가 유독 정신이 없기 때문인지, 내가 종이 다이어리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올해도 벌써 1/3이나 지났고 그 동안 이렇다 할 기록을 남겨 둔 게 없다. 안 그래도 최근에 블로그를 제대로 다시 시작하려고 했는데 마침 집에 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접어 놓은 상태였다.

 지난 주 일요일에 햄스터가 죽었다. 햄스터 이야기는 아저씨 골든 햄스터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쓰려고 했다. 장례도 치러 줬기 때문에 장례식장 정보와 반려동물 장례를 치를 때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을 함께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 그런 글을 쓸 기분이 아니다. 햄스터 케이지와 햄스터가 쓰던 물건들도 그대로 내 방에 남아 있고, 아직 햄스터 쳇바퀴 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햄스터는 2019년 6월 초에 유기되어 포인핸드에 올라왔다. 좋은 분들을 만나 6월 말에 우리 집에 왔다. 그러니까 햄스터의 삶에서 내가 지켜본 기간만 해도 23개월이다. 게다가 아기 때부터 거기까지 자랐을 기간을 생각하면 햄스터가 아주 빨리 갔거나 수명을 못 채우고 간 건 아니다. 사실 나는 햄스터가 유기되어 우리 집에 오기까지의 기간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수명을 계산할 때 나도 모르게 우리 집에 온 날짜를 기준으로 '최소 22개월이 지났으니...' 같은 식으로 어림했다는 뜻이다. 햄스터의 삶에서 한 달은 굉장히 긴 기간이고 그걸 미리 계산하지 않았다는 건 참 멍청한 짓이다.

 하여튼 햄스터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쓰자.

 요즘 입맛이 없다. 햄스터가 죽고 나서 만 하루 넘게 아무것도 먹질 않았다가 출근을 하긴 해야 하니까 떡볶이를 시켜 먹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떡볶이나 매운 라면 같은 음식이 아니면 도저히 당기질 않는다. 어쨌든 햄스터는 이미 갔고 햄스터가 가서 슬프다고 매운 음식들을 줄창 먹어 댔다가는 내 식도와 위도 함께 갈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도저히 음식이 넘어가질 않는다. 고맙게도 주변 사람들이 잘 챙겨 먹으라며 배려를 많이 해 주고 있지만 도대체 뭘 먹어야 이 입맛 없는 느낌이 해소될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햄스터가 죽기 일주일 전쯤부터 별다른 이유 없이 음식이 안 넘어가더라니 지금은 더 심해졌다.

 그리고 또 무슨 이야기를 쓰면 좋을까? 요즘 넷플릭스에서 <김씨네 편의점>을 보고 있다. 캐나다에 사는, 편의점을 운영하는 한국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인데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다. 생각 없이 보기 좋은 웃긴 드라마를 찾는 사람이라면 고려해 보세요. 그리고 아들과 딸이 둘 다 핫하고 귀여워요. 이거 보기 전에는 <에밀리, 파리에 가다>와 <겨우, 서른>을 봤다. 넷플릭스 리뷰도 쓰면 좋을 것 같은데 여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요즘은 밥 챙겨 먹고 출퇴근을 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읽어야 할 책도 쌓여 있고 해야 할 게임도 쌓여 있다. 다른 일에 열중하면 햄스터 생각이 잘 안 나기 때문에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으려고 노력한다. 블로그에 글 쓰는 것도 도움이 될 거 같다. 오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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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미류
일상2021. 4. 23. 13:40

어젯밤에 찍은 사진

 

 이런저런 일에 쫓겨 햄스터 이야기를 못 쓴 지 몇 달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우리 햄스터는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되었다. 햄스터는 보통 2년 정도를 살면 제 명을 살았다고 하고 몸이 약한 아이거나 병이 생긴다면 2년을 못 채우는 경우도 많다. 우리 햄스터는 나와 같이 산 지 22개월 정도가 되었다. 구조되었을 때 이미 거의 다 자라 있었으니까 못 해도 태어난 지 한 달은 지난 상태였겠지? 그러면 이제 우리 햄스터는 2년 정도 살았다고 봐야 한다. 햄스터가 노년에 접어들면 나이를 먹는 게 훅훅 체감이 된다. 피부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예전에는 빵실하게 차올라 있던 털도 조금씩 듬성듬성해진다. 눈이 안 좋아지고 원래는 숨겨 두어도 잘만 찾던 간식을 눈 앞에 가져다 줘도 잘 못 받아먹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를 좀 먹었을 뿐 우리 햄스터는 우리 햄스터다. 얼굴 표정이나 화장실에 갈 때의 모습이나 간식을 먹는 자세를 보면 처음에 우리 집에 왔을 때와 똑같다. 할아버지 햄스터가 되었다고 해서 사랑스럽지 않은 게 아니다. 사랑스러운 우리 햄스터는 나이를 먹어서 사랑스러운 할아버지 햄스터가 되었다. 그래도 제목은 통일해야 하니까 아저씨라고 써야겠다.

 

 우리 햄스터는 가끔 터널이나 구조물을 갉곤 하는데 그 소리가 그리 작지는 않다. 오늘도 햄스터가 잠을 깨워 아침 일곱 시 반쯤 일어나야 했다. 햄스터는 이갈이를 하는 동물이고 그러니까 뭔가를 갉는 건 이 친구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좀 더 다양한 물체를 갉으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햄스터가 터널이나 구조물을 갉는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이갈이용 장난감이나 간식들을 넣어 주곤 한다. 이렇게 쓰면 별 것 아닌 일로 보이지만 사실 나는 중증 불면증 환자였다. 지금은 수면제를 끊었지만 한때는 수면제 없이 절대 잠에 들지 못할 정도였다. 잠에 들어도 작은 소리나 자극만으로도 금방 깨 버리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햄스터가 이갈이를 하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는 건 그리 싫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너무 시끄러워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잠에서 깨는 게 짜증스럽기도 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익숙해지자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졌다. 특히 우리 햄스터가 나이가 들수록 이갈이 소리를 듣는 게 조금 즐겁기까지 했다. 햄스터를 키우는 사람들은 햄스터가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 잠을 자는 모습만 봐도 무섭다고 한다. 이게 잠을 자는 건지, 나를 두고 어딘가로 가 버린 건지 얼핏 봐서는 구분이 잘 가지 않기 때문이다. 햄스터를 길러 본 사람이라면 잠자는 햄스터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숨을 쉬는지 확인해 본 적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갈이 소리가 들린다는 건 햄스터가 아직 내 곁에 멀쩡하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갈이 소리를 듣는 게 즐거운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가끔 내가 모르는 우리 햄스터의 과거를 상상한다. 어떤 털을 가진 엄마와 아빠 밑에서 태어났을지, 우리 집에 오기 전에 이가 부러진 상태였다고 들었는데 그 이는 어쩌다 부러졌을지(설치류라 다시 나서 지금은 완전 건치다), 혹시 내가 모르는, 가장 좋아했던 간식이나 야채 같은 게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게 영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내가 이 작은 생명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와 별개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우리 햄스터는 인간으로 치면 청소년기쯤 버려졌기 때문인지 체구가 그리 크지 않다. 밥과 각종 영양간식들을 잘 먹어도 살이 잘 찌지 않는다. 성장기에 많이 먹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오해를 살까 봐 덧붙이자면 나는 햄스터가 사람을 잘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햄스터가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 손을 무서워하는 바람에 병원에서 조금 불편한 것만 빼면 우리 햄스터는 아주 완벽한 최고의 햄스터다. 하지만 우리 햄스터가 처음부터 겁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면? 아기 햄스터일 때는 용감하고 씩씩한 성격이었는데 별로 좋지 않은 어린시절을 보낸 뒤 버려져서 겁이 많은 성격이 된 거라면?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나는 우리 햄스터가 우리 집에 오기 전에 보냈을 시간들에 대해 영영 알 수 없고 그 시간들이 우리 햄스터에게 끼친 영향을 거의 어떻게 할 수 없다. 그저 지금의 햄스터를 사랑할 뿐이다.

 

 오늘은 이갈이용 덴탈츄를 주면서 햄스터 손을 내 네 번째 손가락으로 살짝살짝 만졌다. 웬일인지 싫어하지 않았다. 그 작고 부드러운 것의 감촉을 원동력 삼아 오늘 하루를 살아야겠다. 할아버지 햄스터는 내 옆에서 쿨쿨 자고 있다. 나는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고 햄스터 똥오줌을 치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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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미류
2021. 4. 16. 02:04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은 책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지나칠 수 없을 법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잔뜩 실려 있다. 책 뒷표지에 적힌 '책이 겪은 사연, 책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문장이 이 책을 아주 잘 설명한다고 본다. 어떤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있었던 일들, 책을 둘러싼 사건들, 그리고 책과 관련된 저자나 다른 수집가들의 일화들을 읽다 보니 내가 겪은 추억들도 하나 둘 떠올랐다. 같은 책을 두 권 사는 건 양반이다. 박스 세트로 구매해 놓고 생각 없이 박스를 버리고 말았던 기억,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던 책이나 선물했던 책에 대한 기억들은 이 책을 읽는 경험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개인적으로 세계문학전집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 특히 인상 깊고 재미있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든 책 모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든 둘 다든, 책 좋아하는 사람치고 세계문화전집에 한 번도 시선을 준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 출판사에서 전부를 모으기 위해 어디서 나오는 전집이 제일 좋은지 비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소 들쭉날쭉해도 좋으니 각각의 출판사에서 마음에 드는 책들을 각각 사다 모은다. 저자는 세계문학전집에 속한 수많은 책들 가운데 1번에 주목한다. 세계문학전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법한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1번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다. 문학동네나 펭귄클래식 등 다른 출판사에서 낸 세계문학전집의 1번은 각각 어떤 작품들일까? 책을 읽다 보면 하나하나 알 수 있게 된다. 또 책 중간쯤에는 문학 작품들의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다. <워더링 하이츠>라는 원제가 한국에서는 <폭풍의 언덕>으로 오역되는 바람에 잘못된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이야기라거나, <소리와 분노>로도 번역되곤 하는 <음향과 분노>가 셰익스피어에서 따 온 제목이라는 이야기 등등.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아니지만,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씨>는 사실 <주홍 글자>로 번역하는 쪽이 더 원제에 가깝다고 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굳이 덧붙여서 적어 둔다.

 

 서평단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적지 않은 책의 서평단으로 활동했고 요즘에도 이따금 서평단 모집 페이지를 기웃거리는 사람으로서 무릎을 탁 치게 만든 대목이 있다. 조금만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서평단에 주어진 가장 무거운 압박은 '책을 읽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즐거움'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서평단 활동을 하다 보면 내가 어려워하거나 관심이 없는 분야의 책도 읽어야 한다. 가끔은 내 가치관이나 사고방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책을 받게 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책이라 하더라도 가치가 없는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책을 쓴 작가와 그 책을 만든 편집자의 노력, 그 책에 들어간 자원들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 의미와 가치를 존중해서 예의를 지키면서도 그 책에 대한 내 감상을 솔직하게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저자가 언급한 대로 서평단에게 주어지는 도서에는 보통 출판사의 증정용 도장이 찍혀 있기 때문에 중고로 판매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대부분 소장하고 싶은 책 위주로 서평단 활동을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구매하는 책과 합쳐지면 양이 꽤 많아지기 때문에 읽지 않을 책을 주기적으로 추려내서 친구나 지인들에게 선물하곤 한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읽는 게 책을 만든 이들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여튼 저자가 서평단 이야기를 다룬 이유는 조지 오웰이 직업적인 서평가였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도 생계형 서평가였다고 하는데, 서평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으려면 역시 조지 오웰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에는 위에서 언급되지 않은,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나쓰메 소세키나 이상, 최인훈,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그들이 쓴 책 이야기. 책 수집가들이 찾아 헤매는 컬렉션, 출간되기도 전에 중고 서점에 올라왔던 한 책에 관한 미스테리한 경험. 책을 만드는 편집자의 애환에 관한 이야기까지, 저자는 그야말로 책에 관한 이야기라면 거의 뭐든지 늘어놓는다. 듣기만 해도 재미있고 유익할 것 같은 책에 대한 소개를 줄줄이 하고서는 "안타깝게도 절판되어 구할 수 없다"란 말을 덧붙이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덕분에 내가 몇 년 전 호기심 때문에 사 두었던 책 한 권이 진작 절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희귀본 수집의 세계로 빠지게 되는 걸까? 하여튼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재미있을 책이다. 그리고 저자의 다른 저서인 <이토록 재미난 집콕 독서>와 마찬가지로, 읽고 나면 다른 책들을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Posted by 김미류
2021. 2. 22. 08:00

 

 <정신과는 후기를 남기지 않는다>는 한 우울증 환자의 정신과 후기를 엮은 책이다. 저자는 정신과에 방문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맘 카페에서 정신과 후기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확실히 온갖 병원 후기가 범람하는 온라인에서도 정신과 후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예전보다는 좀 나아졌나 싶지만, 광고의 힘까지 더해진 피부과나 성형외과 후기의 발끝에도 못 따라간다. 정신과 후기를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신과에 대한 세상의 좋지 못한 시선, 우울증이나 기타 정신질환을 터부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크게 한 몫 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정신과 후기를 쓸 정도로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기를 쓸 수 없으리라. 하여튼, 저자는 이 책에서 저자 스스로의 정신과 진료 역사를 이야기한다. 처음으로 방문했던 병원, 가장 좋았던 의사와 그 이유, 약물을 지나치게 많이 복용했던 시기, 정신과 약물에 의존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시기, 그리고 '베테랑 환자'가 된 현재까지. 여기에서의 베테랑 환자란 대략 스스로의 상태와 외부 사건에 따라 복용하는 약을 조절하며, 병증에 따른 적절한 대처를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환자를 뜻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자는 첫아이를 난산하며 산후우울증에 걸렸다고 설명하는데, 무려 저자가 처음으로 갔던 병원의 의사는 저자를 두고 "언제까지 남 탓하고 계실 거냐"란 말을 한다. 심지어 저자가 안고 간 아이를 가리키며 "지금 얘는 그나마 약 먹으면서 치료를 받고 있는 엄마에게 자라는 게 더 행복할 것"이라고도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저자가 병원을 옮긴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의사 중에서는 환자를 비난하고 몰아세우거나, 시종 환자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나 정신과라면 환자들이 저런 의사에게 받는 악영향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정신과를 방문하려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이런 말을 적는 건 아니다. 의사가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증상이나 약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지 않고 귀찮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면 병원을 옮기는 게 좋다. 정신과 환자는 의사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하여튼 저자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다행히 좋은 의사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위에 언급한 베테랑 환자의 길로 조금씩 나아간다. 저자의 문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 일상에도 패턴이 생겼고 남들처럼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여유도 가지게 됐다. 날이 추워지면 약을 늘렸고 봄이 오면 약을 줄였다. 제사나 경조사 같은 중요한 행사가 잡히면 그 전후로 약을 조절하기도 했다."

 항우울제, 수면제, 각성제, 항불안제, 뭐 기타 등등 우울증 환자가 먹(을 수도 있)는 약은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저자 역시 온갖 약을 먹으며 내과 의사를 당황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약을 줄이고, 또 아예 끊어 보기도 했다. 반 년 정도 단약을 하는 동안 좋았던 점도, 나빴던 점도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다시 병원을 찾게 되고, 약을 다시 먹게 된 스스로의 상황을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라 느낀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개인적으로 매우, 매우 공감했던 내용이 있다. 흔히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말하곤 하는데, 저자가 생각하기에는 '뇌의 고혈압'이나 '뇌의 당뇨병'을 넘어 '뇌의 심근경색'정도는 되어야 어울릴 것 같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평범한 감기는 약을 며칠 먹으면 낫고 약을 안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우울증은 약을 안 먹고 버틴다고, 의지를 가지고 노력한다고 낫는 병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마음을 굳게 먹는다고 호르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우울증은 스스로의 상태와 증상을 인지하고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약을 먹으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만 하는 병이다. 아마 누구나 앓는 감기처럼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고, 우울증이라는 병을 특별히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마음의 감기라는 표현이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표현이 우울증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사실이다.

 저자의 이런저런 경험에 이어 책 마지막 부분에는 정신과 방문을 권유하는 내용이 있다. 저자가 지불한 검사비와 진료비(병원마다, 검사마다 대략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약값, 대학병원에서의 진료를 원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이런 책을 훨씬 오래 전에 읽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가면 살아낼 수 있다. 언젠가는 살아남아 후기를 남길 수 있다."라는 문장을 보니 나 역시 정신과 진료 경험을 블로그에 남겨 두어야겠다는 결심이 든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 후기로부터 작은 도움이나마 얻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정신과는 후기를 남기지 않는다>는 내용이 그리 많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정신과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지, 정신과 진료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약을 먹으면 어떤지 등등 궁금한 점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이 책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김미류
일상2021. 2. 13. 09:52

 

 딱 한 번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처음에 데려왔을 때 먹이던 사료보다 더 좋은 사료로 바꿔 주려고 했을 때였다. 새 사료가 안 맞았는지 스매커가 안 맞았는지 이틀 동안 묽은 변을 봤다. 하필 휴일이었던 탓에 속을 끓였다. 특별히 아프거나 기운이 없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문가도 아닌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 집에 온 지 어느 정도 시간도 지났고, 발톱이나 눈, 털 상태 등이 건강하고 깨끗한지를 확인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병원에 방문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대로 된 검사를 받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의 잘못은 아니었고 햄스터 친구가 너무 경계를 많이 해서였다. 증상을 설명하고 사진 찍은 걸 보여드리고 자세히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햄스터의 변을 검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항문에 검사용 기구를 살짝 넣어서 균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고, 하나는 그 자리에서 햄스터가 변을 보면 그걸 가지고 검사하는 거였다. 햄스터 친구는 의사 선생님이 손으로 잡기만 하면 격렬하게 버둥거리면서 저항을 해서 전자는 불가능했다. 햄스터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햄스터를 거의 만지지 않았다. 당연히 내 손에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빈 리빙박스에 햄스터 친구를 넣고 변을 보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거의 삼십 분 가량을 기다렸지만 햄스터 친구는 긴장한 눈으로 리빙박스 안을 다다다다 오가기만 할 뿐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다행히 사진으로 본 변의 상태나 햄스터 친구의 오늘 모습으로 보아 크게 아픈 것 같지는 않다고 하셨다. 마취를 해서 검사하는 방법도 있지만, 소동물의 경우 마취를 하면 깨어나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증상이 심하지 않을 때는 권하지 않는다며... 하루나 이틀 정도 지켜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알겠다고 하고 이동장을 받아들고는 병원을 나왔다. 다행히 눈이나 귀, 털이나 발톱 같은 곳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게 햄스터 친구가 우리 집에 오고 나서 유일하게 했던 외출이었다.

 나는 핸들링을 하지 않았다. 핸들링이란 뭐 대충 햄스터가 사람의 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걸 뜻한다. 우리 집 햄스터는 우리 집에 올 때 이미 다 자라 있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겁이 많고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햄스터가 사람의 손을 아주 싫어하면 병원에 갔을 때나 보호자의 케어가 필요할 때 곤란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손길을 좋아하지 않는 작은 생명체에게 자꾸 손을 가져다 대기가 힘들었다. 내가 착하고 동물을 생각하는 사람이고, 햄스터를 핸들링하는 보호자들은 햄스터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고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걸 분명히 밝힌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핸들링을 하지 않은 걸 후회한다. 병원에 데려갔을 때 큰 스트레스를 받고 평소에는 내지도 않던 울음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 딴에는 햄스터를 생각해서 최대한 손을 대지 않았지만 사실 그게 나중에 햄스터에게 더 나쁜 결과로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도 햄스터의 변 상태는 집에 돌아오고 나서 차츰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어쩌면 병원에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정도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파도 병원에 안 가는 것보다는 별 게 아니어도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했다.

 동물병원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성인이 되어 동물을 반려하는 것도, 내가 단독으로 동물을 반려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아마 머지 않아 또 동물병원에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나이가 든 햄스터들은 여기저기 크고 작은 병에 걸린다. 그리고 보통은 그 크고 작은 병에 걸려 죽는다. 이제부터는 조금 우울한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남들이 보는 공간에 굳이 쓸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내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 그대로 기록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쓴다.

 나는 이 작은 털투성이 생명체가 없는 내 방을 상상할 수가 없다. 머지않아 햄스터가 없어질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왜 햄스터는 고작 이 년 남짓한 시간밖에 살 수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이 작은 동물이 내게 준 힘에 비해 내가 이 쥐에게 해줄 수 있는 일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나에게 이렇게 중요한 존재가 죽고 나서도 나는 앞으로 길면 수십 년을 더 살아간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그저 쳇바퀴 돌리는 햄스터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던 날들, 무기력한 몸을 일으켜 햄스터 밥을 주고 물통을 갈아 주고 똥을 치우고 혹시나 오늘은 손에 올라와 줄까 손을 내밀어 보던 순간들, 그 모든 게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날 거라는 사실이 두렵다. 이 작은 쥐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엇이고 뭘 하고 싶어하는지 뭘 가장 먹고 싶어하는지 어떨 때 행복해하는지 내가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마음 아프다. 하다못해 가장 먹고 싶어하는 음식이 뭔지라도 알 수 있다면 마지막이 가까워졌을 때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잔뜩 준비해 놓을 텐데. 좁은 이동장에 집어넣고 흔들리는 차를 타고 병원으로 데려갈 때 아픈 네가 낫도록 병원에 가는 거라고 설명해줄 수 없다는 게 힘이 든다.

 얕은 잠에 들었을 때, 아니면 잠들지 못해 몸을 뒤척일 때,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리거나 베딩을 헤치는 작은 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안심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내 방에서 사라질 날에 대해 생각하는 게 두렵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왔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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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미류
일상2021. 2. 8. 22:17

 최애 간식인 밀웜을 마지막 남은 부스러기까지 싹싹 긁어먹는 사진으로 오늘의 글을 시작해야지. 골든 햄스터와 같이 살면서 알게 된 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햄스터는 그루밍을 해서 스스로의 털을 관리한다. 그래서 햄스터는 절대로 물 목욕을 시켜서는 안 된다. 물 목욕을 시켰다가 순식간에 감기나 저체온증으로 크게 아프거나 죽을 수 있다. 우리 집 햄스터도 우리 집에 온 이래로 한 번도 물로 씻긴 적이 없지만 항상 나보다 깨끗하다. 샤워를 하지 않아도 항상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운 털을 자랑하며 냄새도 나지 않는다. 한때는 인간의 입장에서 그게 좀 불공평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인간은 며칠만 샤워를 하지 않아도 털이 떡지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는데... 햄스터는 샤워도 안 하면서 왜 매일 뽀송뽀송할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햄스터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항상 정신없이 그루밍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햄스터의 입장에서는 그게 샤워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햄스터가 나보다 깨끗한 건 햄스터가 나보다 자주 씻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조그만 동물도 매일 몸을 관리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데, 내가 씻기 귀찮다는 생각을 하는 건 영장류로서 한심한 일이 아닐까?

 이 작은 동물의 놀라운 점은 그것뿐이 아니다. 골든 햄스터는 무려 소변을 가린다. 물론 개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잘 가리는 햄스터와 때로 실수(?)를 하는 햄스터, 다소 자유분방한 햄스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햄스터는 철저하게 잘 가리는 편이다. 부드러운 모래로 화장실을 만들어 주면 그 구역에만 소변을 보는데,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햄스터 무시가 아니라 실제로 햄스터는 설치류 중에 지능이 높지 않은 편이다) 햄스터가 소변을 가리다니... 인터넷에서 이유를 찾아보았다. 야생의 햄스터는 먹이사슬 최하위에 있는, 가장 약하고 힘이 없는 동물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냄새를 지우려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햄스터 소변 냄새는 굉장히 강하다. 그래서 소변 냄새를 어느 정도 가릴 수 있는 모래 같은 곳에 소변을 보고 그 자리를 파묻는 것 같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햄스터가 소변을 본 모래만 치우면 집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 대변은 가리지 않는다... 아무 데나 보고 던져 놓고 구석에 모아 놓기도 하기 때문에 가끔 청소를 하다 보면 경악할 때가 많다. 물론 햄스터의 대변은 그렇게 냄새가 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으니까 그냥 청소용 숟가락이나 삽 같은 걸로 푹푹 퍼서 버리면 된다.

 그루밍을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긴 한데, 햄스터는 몸이 굉장히 유연하다.

 대충 이런 느낌이다. 그래서 가만히 햄스터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슥슥 잘 간다. 그루밍할 때는 온갖 기이한 자세를 취하고,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가 길게 쭉 폈다 하기도 하고, 쳇바퀴를 탈 때는 최선을 다한다. 베딩을 앞뒷발로 파기도 하고 종이를 볼에 넣어서 옮겨 둥지를 만들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햄스터가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한다. 터널이나 장난감 같은 것들을 사서 넣어 주기도 하고, 은신처도 이것저것 사곤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맹점이 있는데 바로 햄스터는 마음에 드는 것만 쓴다는 것이다. 게다가 햄스터 집에 넣어 줄 수 있는, 햄스터에게 해롭지 않은 장난감 같은 건 한정적이다. 오늘도 새로 들어온 상품이 없나, 뭔가 참신한 게 없나 하고 햄스터 쇼핑몰을 구경하곤 한다. 몇 개를 사도 햄스터가 쓰는 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위에 이야기한 것들에 비하면 사소하지만 골든 햄스터는 발바닥에 젤리가 있다. 그리고 발이 약간 차갑고 촉촉한 느낌이 든다. 설마 오줌 싸고 밟고 다녀서 그런 건 아니겠지..? 이족보행을 하지는 못하지만 앞발을 어느 정도 손처럼 쓸 수 있어서 귀여운 모습이 자주 나온다. 뒷발로 서서 앞발로 씨앗을 까 먹거나 간식을 먹는 햄스터의 모습은 꽤 잘 알려져 있다. 가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주면 앞발에 힘을 주고 빼앗아 가기도 하는데, 우리 집 햄스터는 보기보다 힘이 굉장히 세다. 손으로 간식을 주고 싶어서 들고 주다가 빼앗기고 황망한 마음으로 햄스터를 쳐다보기만 할 때가 많다. 억지로 만지면 당연히 싫어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만지지 않는데, 가끔 배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잡고 뒤집어 봐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버둥버둥거리는 힘을 보면 이 녀석... 아직 한창이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심이 된다.

 아까 잠깐 언급한 것처럼 햄스터는 그리 지능이 높은 동물이 아니다. 게다가 아주 독립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기르는 사람을 알아본다거나 애교를 부린다거나 그런 건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밥을 줄 때가 되어서 밥그릇을 들고 나가면 밥 때인 걸 알고 밥그릇 두는 2층으로 올라온다거나, 가끔 자기가 내킬 때면 손으로 올라와서 팔을 타고 등반을 한다거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체에 따라서는 사람의 손 위에서 잠들거나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 집 햄스터는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어렸을 때 유기된 영향인지 겁이 매우 많고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도 가끔은 햄스터를 쓰다듬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러면 햄스터 집에 손을 넣고 가만히 있거나 간식을 주며 살살 구슬린다. 햄스터가 내키지 않아한다면 어쩔 수 없으니 쿨한 척 돌아선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제가 먼저 친한 척을 해 줄 때도 있는 법이다.

 이 글은 나중에 햄스터가 내 곁을 떠나고 나서 햄스터를 추억하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일찍부터 주책을 떠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리 집 햄스터는 쌩쌩하다. 지금도 열심히 똥을 던져 놓고 옆에서 그루밍을 하고 있다. 그래도 일찍부터 써서 나쁠 건 없지. 오늘의 글을 마무리하고 햄스터 똥이나 치우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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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미류
일상2021. 2. 4. 23:47

 

 나는 골든 햄스터 한 마리와 같이 산 지 일 년 반이 조금 넘었다. (이 위에 올린 사진이 우리 집 햄스터임) 보통 골든 햄스터의 수명은 대략 2년 정도라고 한다. 오래 전부터 햄스터에 대한 글을 하나 쓰려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잘 먹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요 며칠 동안 잠자는 햄스터의 머리숱(?)이 예전같지 않은 걸 보면서 햄스터 이야기를 한 번 써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우리 집 햄스터는 이제 슬슬 아저씨에서 할아버지가 되어 가고 있고, 아직 건강하긴 하지만 나와 아주 오랫동안 같이 살지는 못할 것이다. 햄스터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와 인상깊었던 몇몇 사건들, 햄스터와 같이 살면서 느낀 점들을 솔직하게 적어 놓고 나중에 다시 보면서 추억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햄스터와 같이 살았던 건 초등학교 4~5학년 즈음이었다. 당시 친한 친구네 집 햄스터가 새끼를 낳았다. 그 중 두 마리를 데려가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고, 두 마리를 데려와서 기르게 되었다. 햄스터는 무조건 한 케이지에 한 마리만 길러야 한다. 변명을 할 생각은 없고, 당시는 지금처럼 햄스터에 대한 사육 정보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나마 불행인지 다행인지 햄스터는 두 마리 다 암컷이었다. 그래서 무분별하게 출산을 하고 새끼가 늘어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햄스터들은 신기할 정도로 오래오래 살아서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살아 있었다. 이런저런 힘든 일이 있었던 어린 시절에 햄스터가 쳇바퀴 돌리는 모습을 구경하던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행복한 기억이 있었던 만큼 햄스터들이 내 곁을 떠난 다음의 상실감이 더 컸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햄스터들이 살아 있을 때, 내 옆에 있을 때 더 잘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했다. 햄스터가 꿈에 여러 번 나오기도 했다. 햄스터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악몽은 돌아가면서 다 꾼 것 같다. 햄스터 수십 마리가 막 섞여서 버려져 있는 꿈, 다른 동물이 햄스터를 잡아먹는 꿈, 사람이 햄스터를 죽이려고 하는 꿈 등등.

 이사를 했고,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자 햄스터와 같이 사는 걸 다시 진지하게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SNS나 햄스터 관련 커뮤니티를 둘러보면서 내 머릿속에 있는 햄스터 사육 정보들을 천천히 업데이트했다. 그리고 마트나 샵에서 햄스터를 사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유기 햄스터를 입양할 수 있는 이런저런 경로들을 알아보았다. 필요한 공간이나 비용 등을 가늠하면서 유기 햄스터 관련 정보들을 찾아보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참 많았다. 먼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유기된 햄스터들을 구조해서 병원에 보내고 아픈 곳을 치료한 다음 좋은 가족을 찾아 주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형마트 같은 곳에서 햄스터를 판매하는 가격이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직도 햄스터는 너무 쉽게 살 수 있는 동물이고, 또 너무 쉽게 버려진다.

 꼭 어떻게 생긴 햄스터를 기르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다. 내가 전에 같이 살던 햄스터들은 드워프 햄스터였다. 같은 드워프 햄스터여도 좋았고, 골든 햄스터여도 좋았다. 털 색이나 무늬 같은 건 뭐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햄스터를 사고 파는 업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털 색이 있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되었다. 특히 골든 햄스터는 무분별한 교배와 판매의 대상이었다. 인기 있는 털을 가진 새끼를 뽑아내기 위해 근친교배를 반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털을 가진 새끼들이 태어나면 버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접하며 유기 햄스터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은 점점 더 강해졌다. 어떤 햄스터와 가족이 되어야 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대전에서 어떤 사람이 열 마리가 넘는 골든 햄스터를 한꺼번에 버렸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들도 있었다. 그 새끼들의 절반 정도, 그리고 엄마 햄스터는 죽었다.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내용들을 보며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다행히 건강하게 구조된 수컷 햄스터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흰 털과 오렌지색 털이 섞인(시나몬 밴디드라고 한다는 모양이다), 거의 다 자란 햄스터였다.

 햄스터는 건강했다. 구조해서 병원까지 데려가 주시고 돌봐 주신 분들 덕분이었다. 나는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지역의 지하철역에 가서 햄스터를 보호해 주시던 분을 만났다. 그 분은 먹던 사료를 챙겨 주시며 내가 들고 간 이동장으로 조심스럽게 햄스터를 옮겨 주셨다. 햄스터가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이동장을 천 가방으로 가린 채로 조심조심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사이에 햄스터 이동장을 들여다보고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발을 동동 굴렀다. 보호해 주시던 분은 햄스터가 아주 순한 아이지만 겁이 많다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와 미리 꾸며 둔 케이지에 넣어 주자 햄스터는 경계하면서도 이내 조금씩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밥도 잘 먹고 쳇바퀴도 잘 탔다. 정말 착한 친구였다. 지금까지 일 년 반 넘게 같이 지내면서 햄스터가 내 손을 문 건 한 번밖에 없었다. 그것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문 게 아니라 살짝 물어 본 정도였다.

 스트릿 출신이라 그런지 가리는 음식도 없고 야채도 나보다 잘 먹었다. 햄스터가 먹어도 되는 과일이나 야채들을 검색해 본 다음 가끔 생야채나 과일을 주곤 했다. 처음으로 바나나를 먹였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조금씩 찹찹 맛을 보더니 이내 와구와구 볼에 밀어넣었다. 생야채나 과일을 줄 때면 혹시나 볼 안에서 음식이 상할까 봐, 아니면 탈이 날까 봐 양을 조절했다. 삶은 감자를 주기도 했고, 햄스터를 귀여워하는 친구들이 샐러드를 만들다 남은 야채들을 컵에 싸 주기도 했다. 브로콜리나 케일, 파프리카, 당근, 삶은 달걀과 메추리알,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주기도 했다. 하나같이 잘 먹었는데 특이하게도 딸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바나나를 너무 잘 먹길래 다른 과일도 좋아할까 싶어서 딸기도 먹여 보았더니 딸기는 몇 입 먹다가 고개를 돌리곤 했다. 너무 달아서 그런가? 밀웜도 잘 먹지만 새우와 연어는 먹지 않는다. 해산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집에는 햄스터용 건조 새우와 건조 연어가 쌓여 있다. 건조 연어나 건조 새우를 좋아하는 햄스터가 있다면 주고 싶다.

 오늘은 햄스터 집 청소를 했는데, 햄스터들은 자기가 자고 싶은 곳에 둥지를 꾸린다. 그 둥지를 제멋대로 건드려 놓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고 나도 햄스터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둥지는 몰래 치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나 결국 몰래 치우는 데 실패하고 잠깐 동안 이동장에 넣어 둔 뒤 급하게 청소를 했다. 이동장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가련한 표정을 한 장 찍어 봤다. 아저씨 골든 햄스터는 지금 옆에서 열심히 접시 모양의 놀이기구를 타고 있다. 나이를 먹긴 했지만 아직 밥도 잘 먹고, 잘 놀고 똥도 잘 싸고 건강한 편이다. 인간 때문에 갖은 고생을 했을 친구인데 지금까지 건강하다는 게 참 대단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그렇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십 년만 더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중에 더 쓰고 싶어질 때 햄스터 이야기를 이어 써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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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미류
사 주면 쓰는 리뷰2021. 2. 4. 05:04

<Hatoful Boyfriend>를 사 준 사람 : j*****님

(내용 누설이 있으니 주의하세요)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게임이지? <Hatoful Boyfriend>는 몇 년 전 비둘기 연애 시뮬레이션, 비연시라는 별칭으로 인터넷 상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평범한 비주얼 노벨, 그 중에서도 오토메 게임 계열인데... 이 게임이 화제가 된 건 공략 대상인 캐릭터들이 사람이 아니라 비둘기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비둘기뿐 아니라 다양한 새들이다. 그렇다면 주인공도 비둘기 혹은 다른 새인가? 설정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주인공은 새들만이 다니는 성 피죠네이션 학원이라는 학교의 단 한 명뿐인 인간 학생이다. 플레이어는 이 주인공(디폴트네임 토사카 히요코)이 되어 선생, 선배, 친구, 후배를 막론하고 많은 새들과 감정을 쌓아 나가게 된다. 그와 동시에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세계관이 존재하는지, 왜 이 세계의 새들은 말을 하고 수업을 듣고 육상을 하고 과학 실험을 하는지, 왜 주인공 혼자만이 이 학교에 인간 학생 신분으로 다니고 있는지를 조금씩 알아 가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 기묘한 게임을 6시간 반 가량 플레이했고 모든 엔딩을 봤다. 스팀 도전과제 100퍼센트 달성도 했다. 

 

 출시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한바탕 화제가 되었던 게임이기 때문에 줄거리나 캐릭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공략 대상인 새는 총 교사인 나나키와 이와미네, 선배인 유우야, 동급생인 료우타와 사쿠야, 앙헬, 오코상, 후배인 나게키까지 총 8마리다. 다시 말하자면 이 캐릭터들은 새다. 사실은 인간인데 저주를 받아서 새가 되었다는 설정? 새의 몸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영혼이 들어가 있다는 설정? 그런 건 없다. 진짜 새다. 

 

무난한 소꿉친구 캐릭터인 료우타.
개인적으로는 이와미네가 제일 내 취향.

 

 다만 캐릭터를 소개할 때 한 번씩 의인화된 모습을 표시해 주는 기능이 있다. 나는 왜 이런 기능이 들어가 있나 의아했는데, 의인화된 모습 없이는 캐릭터의 이미지를 상상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라고 한다...예외적으로 단 한 마리 오코상만 의인화된 일러스트가 없다. 오코상은 제작자가 실제로 기르던 새를 모델로 삼아 만든 캐릭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여튼 뭐 대충 이런 식으로 의인화 일러스트가 있다. (이 아래부터는 스토리의 핵심적인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를 적을 예정이니 원치 않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시면 좋겠습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이 학교는 물론이고 이 세계 자체의 비밀에 대한 단서들이 조금씩 등장한다. 일단 유저는 게임을 하는 내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 새들은 왜 이렇게 똑똑하지? 인간인 주인공과 의사 소통을 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학습능력이 뛰어난 개체들도 많다. 양호 선생인 이와미네 같은 새는 대놓고 훌륭한 업적을 이룩했다는 서술이 있다. 인간이 보기에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런 세계가 된 이유를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조류를 매개로 하는 질병이 창궐해서 인간이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인간들은 조류를 멸종시켜 바이러스의 숙주이자 매개체를 없애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비둘기들에게 특정한 약물을 주사하는데, 그 약물이 인간의 의도대로 효능을 발휘하지 않고 도리어 조류의 지능을 이상할 정도로 향상시키고 만다. 그래서 작중에 나오는 새들이 그렇게 똑똑한 것이다...질병으로 인해 인간의 개체수는 크게 줄어들고, 남은 인간과 조류가 공존하는 상황이 된다. 이런 설정의 창작물이라면 당연하게도 다른 종끼리 서로 화합하려는 분파와 다른 종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려는 분파가 나뉘게 된다. 이 작품에서는 전자의 새들을 비둘기파, 후자의 새들을 매파라고 칭한다. 이 비둘기파와 매파의 대립이 스토리의 아주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모든 캐릭터들과의 엔딩을 한 번씩 본 후에 해금되는 BBL 루트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드러나 있다. 하여튼 이 새들은 새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인간이어야만 하는 이유 역시 본편에 아주 자세히 나온다. 플레이타임이 그리 길지 않으니 흥미가 생긴다면 한 번 해 보는 걸 추천하고 싶다. 

 

 사실상 개그 캐릭터인 오코상과 앙헬을 포함해서 모든 캐릭터들이 이 세계의 진상에 얽힌 이야기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스토리 자체의 완성도도 꽤 높은 편이다. 개그 게임이라고 생각해서 인기를 얻었다가 스토리에 감명을 받은 유저들의 리뷰도 꽤 보인다. 내가 바로 위 문단에 흥미가 생기면 해 보라고 쓰긴 했지만, 사실은 아무에게나 선뜻 권할 만한 게임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평범한 오토메 게임 같은 파트를 지나치고 나면 스토리가 매우 자극적이다. 바로 위에 첨부한 료우타의 대사도 농담이 아니다. 토막살인, 인체개조, 카니발리즘(?)과 같은 요소들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나처럼 비주얼 노벨, 미연시 종류의 게임을 좋아하고 이상한(?) 게임을 좋아한다면 추천할 만하다. 원래 아무도 이상한 게임 매니아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똥겜과 갓겜들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삶... 그 전보다 힘차게 달려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상한 게임 매니아가 되는 길이다.

 

 덧붙이자면 이 게임과 같이 선물받은 게임 역시 이상한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추정되는 파카플러스다. 조만간 플레이하게 될 것 같다. 

Posted by 김미류
2021. 1. 23. 18:26

 

 근래 내가 읽은 책들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확실히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단은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곤 했다. 하지만 그만큼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의 만족감은 상당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견해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철학 세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많은 걸로 안다. 어떤 사람들은 지젝을 두고 있어 보이는 말만 할 뿐 내실이 없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젝이 스타, 이슈메이커로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새롭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는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일단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나면 공론장이 커진다. 공론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열리게 되면 더 새롭고 의미 있는 담론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하여튼 지젝은 이 책에서도 온갖 주제를 망라하며 스스로의 견해를 펼쳐 낸다. 읽다 보면 비교적 상식적인 이야기도 있고, 이건 너무 급진적이지 않나 싶은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한 건 일단 이 책은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을 전부 소개할 수는 없으니, 읽는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기 쉬운 글 한 가지만 짧게 소개해 볼까 한다. 섹스 봇(섹스 로봇)에 대한 이야기다. 인공지능 관련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섹스 로봇에 대한 논쟁 역시 뜨거워지고 있다. 다양한 논점들 중 대표적인 예시를 들어 보자면, 다른 로봇과 마찬가지로 '섹스 로봇에게도 인권이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서 연결되는 '섹스 로봇을 학대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가?'와 같은 이야기가 있겠다. 지젝 역시 섹스 로봇 이슈를 언급한다. 이 이야기는 한 행사에서 섹스로봇이 학대당하고 심하게 망가진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지닌 섹스봇의 위상을 둘러싼 논쟁에 걸려드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섹스 로봇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합당한 근거는, 섹스 로봇이 인간과 같은 자율성과 존엄성을 가지고 거기에서 오는 특별한 권리를 부여받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섹스 로봇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로봇이 실제로 고통을 겪고 슬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들이 경계하는 건 '우리 인간의 문제적인 공격적 욕망, 환상, 쾌락'이다. 최근 온라인 상에서는 다른 사람이 만든 눈사람을 부수는 행위에 대한 갑론을박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 눈사람을 부수는 게 뭐가 문제가 되냐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눈사람을 부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후자의 사람들이 눈사람이 아플까 봐 걱정되어 눈사람을 부수는 행위를 경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저항할 수 없는 대상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섹스 로봇 이슈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의 후반부를 보면, 지난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19의 창궐이라는 거대한 사건 때문에 전 지구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여러 담론들이 거기에 자리를 내 주었다는 언급이 있다. 지젝은 그 이야기를 하며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와 정치가 버니 샌더스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크나큰 바이러스 위기 시국에 맞춰 그들의 활동을 전개할 정도로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한 번에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감염증은 우리가 자연환경과 맺고 있는 불균형한 관계의 일부로 폭발한 것으로서 단순히 건강 문제에 불과한 게 아니다." , "따라서 현재 우리가 대처하고 있는 위기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동력학의 계기들로 분출한 것이다." 확실한 건 바이러스 시국에 와서 더 불거질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한국에서도 자가 격리가 강하게 권고되는 와중에 지낼 곳이 없는 사람들이나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취약계층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감염증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에 더 크게 타격을 받는 것 역시 사회적 약자들이다. 

 

 위에서 소개한 글 외에도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담론들이 소개된다. 기후 변화, 우파 포퓰리즘, 종교 비판,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 마르크스주의 등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거나 생각해 볼 만한 주제들이다. <천하대혼돈>은 책 제목처럼 '천하대혼돈'이라 할 만한 요즘 시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읽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고두고 여러 번 읽어도 의미가 깊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독서 토론이나 독서 모임에 활용하기에도 적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김미류
사 주면 쓰는 리뷰2021. 1. 10. 05:31

<용과 같이 7 : 빛과 어둠의 행방>을 사 준 사람 : j***님

 

이런 갓겜을 하도록 도움을 준 j***(애교뿜뿜 네오)님께 감사를 전합니다.

 작년 말에 용과 같이 7 시작해서 플레작을 마쳤다. 이하는 용같7로 쓰겠다. 용같7을 하게 된 건 친구가 단톡방에 "용같7 사주면 함?"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사 주면 쓰는 리뷰를 쓸 때가 되었군 싶은 마음에 승낙했다. 나는 ps4로 플레이했고, 3만원은 크리스마스? 연말? 세일 가격이었다. 사실 처음 게임을 샀을 때는 "아싸 공짜게임 ㅋㅋ"라는 생각을 했을 뿐 용과 같이 시리즈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다. 친구들 중 몇 명이 이 시리즈를 재미있게 플레이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던 탓에 내가 아는 건 키류, 마지마, 이치반, 뭐 그런 사람 이름들과 그들이 야쿠자라는 것 뿐이었다. 시리즈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물론 전작부터 플레이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나 감동은 있을 것이다) 혹시나 이 게임을 아직 플레이하지 않은 누군가가 이 글을 읽게 될지도 모르니 스토리의 핵심적인 부분은 가능한 한 쓰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아주 작은 스포일러조차 피하고 싶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연말연시에 플레이하기 좋은 게임.

 그러면 용같7의 좋았던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선 용같7은 턴제 전투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그 점에서 세가의 자회사인 아틀라스에서 만든 페르소나 시리즈와 비교되기도 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용같7을 야쿠자 페르소나라고 해도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투 시스템뿐 아니라 '인간력'으로 대표되는 능력치 올리기, 소소한 서브 퀘스트의 양상이 꽤 비슷한 편이다. 하여튼 이 턴제 전투 시스템을 처음 도입한다고 했을 때는 말이 많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대성공 아닌가? 용같7을 깨고 나서 용같 극을 살짝 해 봤는데 액션게임을 넘어 거의 격투게임 같은 전투 시스템이 꽤 어려웠다. 물론 내가 게임을 못 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이 턴제 전투는 용같7의 진입장벽을 크게 낮췄다. 그래서 난이도 조절이 크게 필요 없다. 용같7의 턴제 전투가 재미있었다면 페르소나 시리즈도 해 보면 좋다. 

 

 그리고 용같7은 그저 맵을 걸어다니는 것만으로 즐겁다. 일단 맵을 현장감 있게 잘 만들었고, 현실적인 요소들을 잘 살렸다. 맵 곳곳에 있는 자판기를 예로 들어 보자. 빨간 자판기와 파란 자판기가 나란히 서 있다. 빨간 자판기와 파란 자판기의 내용물은 겉으로 보기에 다르다. 그렇다면 실제로 자판기와 상호작용을 했을 때도 그 내용물이 다를까? 정답은 '그렇다' 이다. 자판기의 내용물뿐 아니라 동네에 따라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들도 조금씩 다르다. 퀘스트 때문에 특정 음료수를 사야 해서 급하게 가까운 편의점에 들렀는데, 그 편의점에서는 팔고 있지 않아 다른 동네의 편의점에 가야 하는 일이 빈번하다. 물론 현실이라면 내가 찾는 물건이 가까운 편의점에 없을 때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게임이니까 그냥 스마트폰 열어서 콜택시 부르고 딴 데 가면 그만이다. 맵을 돌아다니는 자동차들은 교통 신호를 준수하여 움직인다. 빨간 불에 길을 건너는 건 플레이어의 자유이지만 빨간 불에 길을 건너면 차에 치일 수도 있다. 차도에서 전투를 하면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려 대기도 한다. 자판기 밑을 뒤지다 보면 동전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런 소소한 디테일이 재미있다. 맵 중에서는 코리아타운도 있는데, 코리아타운의 간판들은 전부 한글로 되어 있고 코리아타운에서는 한국어로 시비를 거는 적들이 나오기도 한다. 

 

한글로 된 곱창전골 집 간판.

 마지막으로 스토리가 좋다. 하지만 메인 스토리 이야기를 하려면 큰 스포일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 않을 생각이다. 딱 한 마디만... 오타쿠를 가슴 벅차게 하는 딱 한 마디만 할까 생각하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서브 스토리들도 아주 발랄하다.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자신을 만족시켜 줄(?)고통을 찾아 헤매는 마조 아저씨 이야기, 무료 급식 봉사를 하는 여성을 짝사랑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노숙자 이야기, 아픈 동생의 병원비를 위해 모금을 하는 어린 소녀 이야기 등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치반과 플레이어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며 요코하마 이진쵸의 용사로 살아간다. 깨다 보면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만한 퀘스트들도 있지만 평범하게 훈훈한 퀘스트들도 많다. 그리고 대체로 재미있다.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된 마조 아저씨..

 그렇다면 용같7은 불세출의 갓겜인가? 결점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게임인가?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아쉬운 점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정도는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인 이치반은 야쿠자다. 물론 작중의 이치반은 약한 사람을 괴롭힌다거나 누군가에게서 돈을 빼앗는다거나 죄 없는 사람을 때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치반이 속한 뒷세계에서는 약탈이나 살인과 같은 범죄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런 요소에 아예 내성이 없는 사람이나 청소년들에게 권할 만한 게임은 아니다. 방금 찾아 보고 오니 청소년 이용불가 게임이네. 이치반이 태어난 도원향은 소프랜드고, 작중에서도 소프랜드 및 기타 업소들에 대한 언급이 꽤 잦은 편이다. 주인공 일행 중 하나인 아다치가 '딜리버리 헬프'를 '출장 여성'으로 착각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실제로 딜리버리 헬프는 전투 중 주인공 일행에게 도움을 주는 NPC를 부르는 시스템이다) 기본적으로 용같7은 아주 이상한 게임이다. 바로 위의 마조 아저씨 캡쳐만 봐도 어느 정도는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이상한 게임들은 뭘 잘못 만들어서, 아니면 못 만들어서 이상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용같7은 이상한 걸 아주 정성스럽게 고퀄리티로 만들어서 이상한 게임이다. 아저씨들이 입은 기저귀의 질감 같은 걸 보면 그 현실감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마지마 딜리버리 헬프 영상이 멋있어서 나중에는 자주 불렀다.

 메인 스토리 외에도 서브 스토리, 회사 경영, 드래곤 카트, 야쿠몬 도감(대놓고 포켓몬을 패러디한 것 같다), 알바 히어로, 히로인 공략 등 컨텐츠가 상당히 많다. 그래서 긴 시간 여유롭게 즐기려면 할 수 있는 게 꽤 많다. 개인적으로는 연애 요소가 적은 게 좀 아쉬웠다. 사실상의 메인 히로인인 사에코 외에도 함께 회사를 경영하는 에리, 장비 제작을 해 주는 낭만 공작소의 스미레, 아지트인 서바이버의 점원인 이로하, 직업을 바꾸도록 도와주는 리리카, 자격증 학원의 미야코시까지 총 여섯 명의 히로인이 있다. 나는 당연히 모든 히로인 호감도를 다 올렸다. 왕년에 좀 놀았다는 쾌활한 말투와 목소리의 스미레가 너무 좋아서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는데, 스미레는 호감도 이벤트가 끝나니까 싸늘하게 한 명의 NPC로 돌아가 장비 제작과 강화만을 해 줄 뿐이었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CG가 남는 것도 아니니 그저 한없이 과거의 추억을 회상할 수밖에...

 

 플레작까지 총 플레이타임은 70시간 좀 넘게 걸린 것 같다. 아깝지 않은 70시간이었다. 나중에 DLC 사서 한 번 더 해야겠다.

 

뭘 좀 심고 싶어지는 화분.

 

Posted by 김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