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뭘 몰라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결단코 단 한 번도 없는가?' 이 책의 표지에 쓰여 있는 문장이다. 양심적으로 고백하자면 당연하게도 한 번도 없지 않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라고 생각한 적도 많다. 물론 나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드물지 않을까? <내 안의 차별주의자>라는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참 적절하다. 차별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를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이하는 편의상 '사람들'이라고 줄여 쓴다) 자신과 다른 존재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긋는다. 나와 성별이 다른 사람,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 나와 사회적 계급이 다른 사람, 나와 다른 종교를 믿거나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그 선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 바깥에 있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거나 박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선을 긋는다는 행위 자체가 그런 차별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사람들이 어떻게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책의 목차를 훑어보면 일, 성, 이주, 빈부 격차, 범죄, 소비, 관심, 정치라는 키워드로 내용이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 파트는 노동에 대한 내용이다. 저자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 열정을 가지라는 말이 보여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이들의 멘토가 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서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열정을 착취당한다. '열정 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또,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이 분리되면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종류의 노동을 하는 이들을 타자화하게 되었다. '성' 파트에서는 말 그대로 성차별에 대해 다룬다. 이 책은 노동 시장과 가족 관계 안에서의 성차별부터 시작해서, 남성과 여성이 차지하는 공간의 차이, 여성의 목소리 높낮이가 변화한다는 사실, 피임과 성행위에서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짚는다. 사회가 남성에게 남성다움을 강요함으로써 남성과 여성 모두를 좋지 않은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는다. 다른 주제들에 관해서도 '소속 범주로서의 '우리'가 노동, 성별, 이민, 빈곤, 재산, 범죄, 소비, 관심, 정치의 영역에서 어떤 구조를 띠는지, 또 그 안에서 '남들'을 바라보는 독선적 시선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핀다'(서문,14p).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게 읽은 건 '소비'파트였다.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하다못해 그냥 닭고기를 먹을지, 동물복지 닭고기를 먹을지, 닭고기를 먹지 않을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과 선택할 수 없는 여건에 놓여 있는 사람이 있다. 저자는 유기농, 동물복지, 공정무역, 친환경과 같은 의식이 담긴 소비가 사회적 신분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스와로브스키의 상속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테라스에 채소를 심어 먹으면 된다'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테라스에 채소를 심어 먹을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던 걸까? 덧붙이자면 나는 지속 가능한 소비에 분명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의식적 소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소비하는 것을, 어떤 제품을 사는 것을 아예 포기하는 게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는 저자의 의견은 분명 생각해 볼 만하다. 친환경 기업에서 화장품을 열두 개 사는 쪽보다는 화장품을 사지 않는 쪽이 더 친환경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기업에서 화장품을 열두 개 사는 쪽보다는 친환경 기업에서 사는 쪽이 더 낫겠지만. 어떤 기업들은 분명 자신들이 더 윤리적이라는 이유로, 더 친환경적이라는 이유로 소비를 부추긴다. 그런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인 주체로서 돈이 없고 시간이 없으며 소비 문제에 무지한 사람들'(189p)을 무시하게 된다는 점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독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문장으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는 달리 별 생각 없이 살아간다고 단정짓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그렇게 단정짓고 나면 타인에 대해 이해할 필요도 없고, 타인이 무슨 행동을 하든 한심하게 여기면 끝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그렇게 별 생각 없지도 납작하지도 않은 존재다. 내가 하는 행동에 이유가 있다면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에도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타인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고 싶은, 그리고 자신에게는 조금 더 엄격해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 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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