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31. 22:28

 

 나는 의학 서적을 잘 읽지 않는다. 매번 서평을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 같긴 한데 사실이다. 의학 서적을 잘 읽지 않는 이유는 보통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를 펼칠 때도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 책은 그럭저럭 재미있게 다 읽었다. 전문적인 내용을 쉽고 공감이 가는 문장들로 설명해 주는 책이었다. 물론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다루는 만큼 읽기에 아주 쉬운 책은 아니지만, 읽어 두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 열심히 읽었다.

 

 책에는 이미 아는 내용도 있었고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내용도 있었다. 이를테면 한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 중 하나인 뇌졸중에 대한 정보는 거의 대부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뇌졸중은 물론 중대한 병이지만, 뇌졸중 환자 중 대다수는 병을 앓기 전과 같은 상태로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저자는 뇌졸중 전문의다). 저자는 한국인들이 뇌졸중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에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 있지 않을지 추측한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중병을 앓아 목숨을 잃는 것도 물론 두렵지만, 건강하지 못한 채로 오래 살면서 고통을 받고 돈을 쓰는 것 역시 두려우니까. 하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본인이 마주치는 뇌졸중 환자들에게 종종 "지금이 최악입니다"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환자가 의사를 만났을 당시가 최악의 상태고, 적절한 치료와 재활을 병행하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병이 뇌졸중이라는 것이다. 뇌졸중 전문의로 살아가다 보면 뇌졸중 발병에 대한 큰 두려움을 품은 환자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는 모양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뇌졸중은 관리할 수 있는 병이고, 발병 이후에도 충분히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병이라고 하니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물론 어느 병이든 걸리지 않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어느 병이든 걸리지 않는 게 제일 좋다. 아마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분명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건,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병을 앓으며 살아간다. 흔하게 걸리는 감기도 그렇고, 현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드문 질병이 아닌 위염과 식도염, 하다못해 안구건조증 같은 병도 병이다. 그렇지만 내가 안구건조증에 걸렸다고 해서 일상을 살아갈 수 없는 건 아니다. 조금 불편하지만 적당히 관리를 하면서 살아가면 일상생활에 큰 문제는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건강을 관리하는 법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누구나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부분들이다. 이를테면 규칙적인 운동, 금연, 절주 등이다. 조금 특이한 점은 감기에 걸리지 않는 법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다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감기는 누구나 한 번쯤은 걸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걸리는 사람도 있는 아주 흔한 질병이다. 사실 가벼운 감기는 학교에 가거나 일을 하는 데 그리 큰 불편을 끼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만약에 아주 중요한 일을 앞두고 감기에 걸린다면 어떨까? 누구나 중요한 시험, 발표, 면접이나 결혼식 같은 자리에서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을 것이다. 이 책에는 '적어도 며칠간은 감기 안 걸리기' 라는 파트가 있다. 그 파트에는 인생의 중대사를 앞두고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감기를 피하는 방법들이 아주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나도 이 정보들이 필요할 때는 한 번 실행에 옮겨 볼 생각이다. 다 적지는 않겠지만 책의 띠지에도 나와 있는 내용 하나만 언급하자면, 깨끗한 손으로 코 속을 닦는 게 감기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 책에서는 당연히 영양제와 건강기능식품에 대해서도 다룬다. 결론만 말하자면 크릴오일은 먹지 마라. 먹을 필요가 없으니까. 평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며 영양소를 섭취하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굳이 별도로 영양제를 먹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한다든지 하는 이유로 영양 상태가 다소 불균형한 상황에서는 오메가3 등의 영양제를 먹는 게 당연히 도움이 된다. 다이어트를 할 때 오메가3를 먹으면 좋다는 말은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들은 이야기였는데, 이 책에 똑같은 말이 실려 있어서 신기했다. 전문가들이 검증(?)한 내용이니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라면 영양제를 좀 챙겨 먹어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의료인으로서 가진 책임감이 좋았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사람들이 가지는 과도한 공포심을 잠재워 주려고 노력하고, 의사와 약을 믿어야 할 이유에 대해 최선을 다해 설명하려고 한다. 요즘에는 약물에 대한 불신 때문에 약을 먹지 않아 더 심각한 상태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약을 먹는 게 전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사정은 있으니 누군가는 의사를 믿지 못할 만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좋은 의사, 믿을 만한 의사는 분명히 많다. '나를 포함해 언론이나 방송에서 떠드는 의사들은 믿지 마라' 라는 문장을 읽으며 저자가 쓴 이 책에 더 신뢰감을 갖게 되었다면 나는 저자의 의도를 거스른 독자일까? 어쨌든 <병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는 일반인이 쉽고 재미있게 읽기 좋은 의학 서적이다. 특히 건강 염려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Posted by 김미류
2022. 1. 9. 23:59

 

 시집의 후기를 쓸 때마다 고민하는 점이 하나 있다. 시 본문을 후기에 어디까지 써도 좋은가이다. 사실 다른 책 서평을 쓸 때도 똑같이 고민하지만, 내가 정해 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소설의 경우에는 서평을 읽는 사람이 흥미를 느낄 만한 정보나 줄거리의 앞부분만을 소개하고, 치명적인 반전이나 결말은 가능한 한 절대 쓰지 않는다. 주제의식이나 내가 느낀 감상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서술하되 내용 본문을 너무 많이 발췌하지 않도록 신경쓴다. 기타 교양서적도 비슷한 기준으로 글을 쓰는데, 후기랍시고 본문 내용을 거의 다 줄줄 적어놓는 건 서평이 아닐뿐더러 원작자의 저작권을 해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집 후기를 쓸 때가 가장 고민이 된다. 좋은 구절을 적어서 이 시인의 매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시의 경우 소설보다도 내용이 짧기 때문에 너무 많은 부분을 적게 되면 읽는 사람이 굳이 시집을 돈 주고 살 필요가 없다. 이번에 서평을 쓰게 된 책도 시화집이라서 충분한 고민을 한 끝에 글을 쓴다. 일단 이 글에서는 시의 본문을 절대 쓰지 않고 내 감상이나 좋았던 문장 한두 문장 정도만 쓸까 한다.

 

 나태주는 아주아주 유명한 시 '풀꽃'을 쓴 사람이다. 유라는 걸그룹 걸스데이의 멤버였다. <서로 다른 계절의 여행>은 나태주가 시를 쓰고 유라가 그림을 그린 시화집이다. 두 작가의 조합이 특이하기도 하고 작년에 나태주 시인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었던 터라 흥미롭게 독서를 시작했다. 

 

 서러운 대로 인생은 아리땁기도 한 것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장이었다. 시집을 읽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이따금 이런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짧은 문장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시집을 읽는다. 하루가 힘들다가도 퇴근하는 길에 날씨가 맑아 하늘이 예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사람이다. 

 

 네 생각만으로도

 살아야겠다는

 싱그런 결의가 생긴다

 

 문장들을 읽다 보면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나이가 많은 시인이 긴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시를 쓴다는 말도 일리가 있고, 젊은 시인이 신선한 발상을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일단 오랫동안 자신과 주변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글을 써 온 사람들의 문장에 깊이가 있는 건 맞다고 생각한다. 나태주의 문장은 그런 문장이다. 깊이가 있고 공감하게 된다. 잔잔하게 위로를 준다. 유라의 그림들 역시 시와 잘 어울려서 두 사람의 조합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지만 일 년에 한 권 정도는 읽곤 하는데, 올해의 시작을 함께하기에 적절한 책이었다. 후루룩 한 번 훑어보았는데 찬찬히 한 번 더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Posted by 김미류
2022. 1. 9. 02:55

 

 나는 작년에 오렌지자스민 하나를 죽였다. 식물을 잘 길러봐야지 하고 선물받아서 집에 온 지 며칠만에 꽃까지 피웠는데, 갑자기 언제부터인가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이게 물을 못 먹어서 이런 건지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과습으로 이런 건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이럴 때는 도박을 하는 마음으로 물을 잔뜩 주든지 아니면 물을 주지 않고 놔둬야 하는데, 보통 나 같은 원예 초보자들은 전자를 택한다. 그리고 망한다. 하여튼 오렌지자스민이 죽은 뒤에 죄책감을 느껴서 당분간은 식물을 기르지 않기로 했다.

 

 <크레이지 가드너>는 <극한견주>로 잘 알려진 마일로 작가의 최신작이다. 특유의 유머감각을 곁들이면서도 원예 초보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이 꽤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특히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벌레들이 귀엽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진딧물, 응애, 뿌리파리를 그렸는데 현실적으로 그렸다면 거기서 책을 덮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일로 작가 특유의 그림체로 귀엽게 그려져 있어서 거부감이 없었다. 내가 소소하게 식물을 키울 때도 도저히 뿌리파리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식물 갯수를 늘리지 않았었는데, 책을 읽어보니 뿌리파리를 잡기 위해서는 농약을 써야 한다고 한다. 파리 자체는 살충제만 뿌려도 죽지만 파리 애벌레가 식물의 뿌리를 갉아먹는다는 모양이다. 화분 몇 개를 건사하기 위해 농약까지 쳐야 하다니... 하지만 벌레들과 같이 살 자신도 없을뿐더러 뿌리파리가 있으면 식물을 제대로 기를 수가 없다. 식물이 많은 사람들은 해충별로 잘 듣는 살충제와 농약을 구비해 두고 쓰는 것 같았다. 

 

 

 취미로 화분 몇 개 정도 길러본 입장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신기했다. 같은 식물들도 잎에 흰색이 섞여 있는지 아닌지 여부에 따라 가격과 생육 난이도가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식물에도 '신상'과 같은 유행이 있고, 수입되는 식물들은 통관 여부에 따라 가격이 오르거나 내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식물로 재테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확실히 플랜테리어가 트렌드긴 하구나 싶었다. 기르기 쉬운 식물들, 특이하게 생긴 식물들, 유행하는 식물들에 대해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개그만화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특성상 식물들의 특징을 매우 잘 잡아서 그리기 때문에 그림만 봐도 식물의 실물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예전에 기르던 다육 몇 개는 그래도 몇 년 동안 잘 살아 있었지만 결국 지금까지 살아남지는 못했다. 작년에 오렌지자스민을 죽인 뒤로는 왠지 죄책감도 들고 자신이 없어서 새로운 식물을 집에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있게 만화를 보다 보니 다시 식물을 길러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게발선인장을 키우고 싶은데 조금 촌스러운 이미지인가 고민하는 부분에서 공감이 갔다.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 가면 커다란 게발선인장이 여러 개 있었는데, 선명한 색의 꽃을 피우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서 크고 나서 나도 게발선인장을 길러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요즘에는 기르는 사람이 적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작가의 결론은 본인이 기르고 싶으니 기르겠다는 거였다. 매우 기르기 쉬운 식물이니 식물을 많이 길러 본 적이 없는 초보자들에게 추천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르기 쉽다는 식물도 죽이는 나에게는 역시 마리모가 딱이라는 생각에 지금은 마리모만 기르고 있다. 이 책에도 마리모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실려 있는데, 작가가 과거에 실수로 마리모를 찢어 죽였다는 이야기다. 가짜 마리모가 워낙 많기도 하고 한 달이 넘게 물을 갈아 주지 않았는데도 마리모가 너무 멀쩡해 보여서 반으로 찢어 살펴보다가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마리모가 갈색으로 변해 죽어 있었다고 한다(책에도 언급되지만 사실 찢겨 죽은 건 아니고 말라 죽은 거다). 사실은 나도 내가 기르는 마리모가 가짜가 아닌지 3년 동안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혹시 진짜면 미안하니까 찢어 죽이지는 말고 물을 열심히 갈아줘야겠다.

 

 결국 책을 읽다가 게발선인장이며 리톱스, 칼큘러스 등등 온갖 식물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서 한참 동안 사진을 봤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기르고 싶기도 하고, 막상 기르려고 집에 들이면 분갈이며 물주기며 벌레며 머리가 아프기도 하고 그렇다. 겨울이 지나면 새로운 식물을 집에 들이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야겠다. <크레이지 가드너>는 이제 1권이 출간되었는데, 뒷 내용과 이런저런 다른 내용들이 궁금해져서 웹 연재분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물 기르는 취미를 갖고 있거나, 갖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고 워낙 재미있게 그려져 있어 읽다 보면 웃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Posted by 김미류
2020. 9. 7. 20:05

 

 <헝거 게임>시리즈 영화를 올해 정주행했다. 강인하고 심지 굳은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의 캐릭터는 참 매력적이었고, 캐피톨과 12구역 사이의 대립에 대해 묘사한 세계관 역시 보는 이를 흥미롭게 하는 탄탄함을 갖추고 있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헝거 게임은 무고한 소년소녀들이 서로 죽이도록 만드는 잔혹한 시스템이다. 헝거 게임 시리즈를 보다 보면 그 잔혹한 시스템의 한 축을 떠받들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바로 판엠의 독재자인 코리올라누스 스노우다. 헝거 게임 시리즈에서 스노우는 잔혹하지만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그리고 피와 장미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그 코리올라누스 스노우의 이야기다. 인정사정 없는 독재자인 스노우에게도 당연히 소년 시절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치밀하고 잔인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헝거 게임 시리즈 프리퀄의 주인공이 스노우라는 건 좀 놀라웠다. 독자들이 좀 더 우호적으로 느낄 만한 다른 좋은 인물들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를 읽는 동안에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 대한 생각은 접어둘 수 있다. 스노우의 앞에 닥친 일들에 대해 생각하기에도 모자라니까. 코리올라누스 스노우는 한때 고귀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몰락해 버린 스노우 가문의 마지막 남은 둘(나머지 하나는 그의 사촌 누이인 티그리스다)중 하나다. 나이가 들고 아무런 힘도 없는 그의 할머니,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티그리스가 그의 가족이다. 스노우 일가의 세 명은 완전히 낡은 아파트에서, 그들이 몰락해 버렸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간다. 그러던 와중 음식조차 풍족하게 먹지 못하며, 빈곤을 숨기는 게 급선무인 스노우의 삶을 바꿀 계기가 찾아온다. 바로 스노우가 제 10회 헝거 게임의 학생 멘토로 선정된 것이다. 헝거 게임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건 스노우 본인의 인생을 역전할 기회이자 가문을 재건하기 위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노우와 짝을 짓게 된 조공인은 우승하는 데 가장 불리하다고 평가받는 12구역의 여자아이인 루시 그레이 베어드다. 스노우는 루시 그레이 베어드를 최대한 이용할 마음을 먹게 된다.

 

 루시 그레이 베어드는 어딘가에서 구한 화장을 하고, 무지갯빛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다. 그녀는 스스로를 처음으로 보이는 자리에서 노래를 함으로써 모두의 주목을 끈다. 루시에게 음식을 구해다 주고, 루시의 삶에 대해 들으며 스노우는 점점 루시라는 인물에게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스노우 본인과 루시 모두를 위해 루시를 헝거 게임에서 우승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편 학생 멘토들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사고가 발생한다. 어떤 멘토는 헝거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살해당하고, 어떤 멘토는 뱀에게 물려 끔찍한 독을 주입당하고 정신적으로 불안해진다. 구역에서 캐피톨로 이주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구역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세자누스의 돌발 행동들 역시 헝거 게임의 분위기를 심상치 않게 만든다.

 

 스노우는 루시 그레이 베어드가 헝거 게임에서 우승하게 만들 수 있을까? 헝거 게임이 끝난 뒤 스노우는 어떻게 될까? 이런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서평에 쓰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스노우의 미래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는 판엠의 독재자가 된다.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의 재미있는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거의 대부분의 독자는 코리올라누스 스노우가 잔혹한 독재자가 되는 미래를 알고 있다. 그랬던 스노우에게도 누군가를 동정하고, 가족들과 사소한 행복을 맛보고, 사랑에 빠지고 달콤한 꿈을 꾸고, 갈팡질팡하고 초조해했던 과거가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스노우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럴 때마다 이런 소년이 나중에는 그 스노우가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씁쓸함과는 별개로, 이 책은 헝거 게임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훌륭한 선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몰랐던 판엠, 캐피톨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본편에는 나오지 않은 또 다른 매력적인 캐릭터들까지.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놓을 수가 없는 소설이다. 

Posted by 김미류
2020. 8. 26. 14:10

 

 사람의 기억이란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하다. 기억의 불완전성에 다룬 유명한 작품으로 영화 <라쇼몽>이 있다. 같은 사건을 사람에 따라 다르게 기억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의 선후관계를 뒤죽박죽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사악한 자매>의 도입부는 그런 기억의 불완전성에 관한 내용이다. 주인공인 레이첼은 어머니를 죽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레이첼은 어머니의 삶을 빼앗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15년 동안이나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머니를 죽였다는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사건의 진상을 찾아 정신병원을 떠난다. 소설은 현재 레이첼의 시점, 그리고 레이첼의 어머니인 제니의 과거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진실을 알기 위해 분투하는 레이첼의 현재와 서서히 진상을 드러내는 제니의 과거가 교차되며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이렇게 시점을 교차하는 방식이 재미를 더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느꼈다. 흥미가 고조되는 부분에서 내용이 다른 시점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뒷 내용을 알고 싶어서 책을 빨리 읽게 된다. 레이첼은 동물이나 곤충과 이야기할 줄 안다. 레이첼은 그런 자신이 잘못된 것이고, 사실은 병 때문에 동물과 대화할 줄 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계속해서 고민한다. 독자의 고민도 이어진다. 레이첼은 정신적 병증이 있는 인물로 보인다. 레이첼이 진짜 자기 부모를 죽인 건 아닐까? 아니면 정말 다른 진범이 있는 것일까?

 

 과거의 제니와 현재의 레이첼의 이야기가 각각 전개되면서 드러나는 한 인물이 있다. 바로 레이첼의 언니이자 제니의 큰딸인 다이애나다. 레이첼과는 9살 터울인 다이애나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여성이다. 내용 누설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자세히 쓰지는 않겠지만, 제니가 다이애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읽고 있으면 가슴이 서늘해지고 손발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든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태연한 악의, 그리고 그 악의를 감당할 수 없지만 아이를 지켜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무서우면서도 안타깝다. 결국 레이첼은 어렸을 때 가족들과 함께 살던 숲 속의 집으로 향한다. 그 숲 속의 집은 분명 레이첼이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들을 잔뜩 만들었던 공간이지만, 현재의 레이첼에게는 거대한 악의와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곳일 뿐이다.

 

 <사악한 자매>는 여름에 읽기 딱 좋은 스릴러 소설이다. 섬뜩한 분위기, 과거와 현재가 세련되게 교차하는 장면들을 보면 영화로 만들어져도 재미있을 것 같다. 수많은 야생동물들이 살아가는 숲,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뭐든 배울 수 있는 큰 별장. 제니는 그 숲속에서 하얀 곰 새끼를 목격하기까지 한다. 말로만 들으면 아이들을 키우기에 아주 이상적인 환경일 것만 같다.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제니 부부의 마음이 이해가 가서 그들이 맞은 결말이 더 안타까웠다. 살아남은 레이첼이 마주한 진실은 무엇인지, 숲 속의 집으로 돌아간 레이첼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적지 않는다. 누군가가 인터넷에 써 놓은 줄거리를 읽는 것보다 직접 읽는 게 몇 배는 더 재미있을 소설이다. 한 번에 훌훌 읽어버릴 수 있는 스릴러 소설을 찾는다면 <사악한 자매>를 읽는 건 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김미류
2020. 3. 7. 19:08

 

 시선을 사로잡는 제목이다.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주인공인 콜린은 오직 캐서린(Katherine)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에게만 사 랑에 빠진다. 정말 이름으로만 사랑에 빠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한 것이, 콜린을 거쳐 간 열아홉 명의 캐서린들은 캐서린이란 이름 외에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다. 콜린은 어떤 캐서린과는 큰 감흥 없이 금방 헤어진다. 어떤 캐서린과는 연애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짧은 접점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열아홉 번째 캐서린은 좀 다르다. 열아홉 번째 캐서린에게 차인 콜린은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깊은 슬픔에 빠진다. 콜린은 캐서린의 연락을 기다리고, 울고, 먼저 전화를 걸어 보기도 하고, 멍하니 생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열아홉 번째 캐서린의 마음이 이미 자신을 떠난 지 오래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이대로는 도저히 실연의 아픔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콜린은 친구인 하산과 함께 무작정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 없이 그저 달리기만 하던 콜린과 하산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무덤을 보기 위해 테네시 주 것샷이라는 지역에 다다른다. 그들은 것샷에서 매력적인 투어 가이드이자 구급대원인 린지, 린지의 어머니이자 큰 공장의 책임자인 홀리스를 만나고 그들의 집에서 머무르게 된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그 사라예보 사건으로 살해된 피해자이다. 그의 죽음은 제 1차 세계 대전을 촉발하는데, 소설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런 정보가 <열아홉 번째 캐서린에게 또 차이고 말았어>에서는 이따금 자세하게 언급된다. 이는 주인공 콜린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추정된다. 콜린은 명석하고 기억력이 좋지만 천재는 아니다. 콜린의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콜린에게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콜린은 '노벨상을 기대하진 말아야 할' 적당히 똑똑한 소년으로 자랐다. 콜린은 애너그램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콜린의 생각은 끝없이 뻗어나간다. 아무 때나 자신이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는 정보들을 친구는 물론 독자들에게도 줄줄 이야기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재미있다.

 

 콜린과 하산은 홀리스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녀의 일을 돕는다. 그들은 린지와 함께 것샷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콜린은 연인 관계에서 누가 차는 쪽에 속하고 누가 차이는 쪽에 속하는지를 예측할 수 있는 공식을 만들기 위해 연구한다. 콜린의 일상은 그 연구에 대한 몰두, 새로운 사람들과의 다양한 관계, 그리고 캐서린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진다. 콜린의 연구는 결국 어떻게 되는지, 콜린이 열아홉 번째 캐서린에게서 완벽히 벗어날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소설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콜린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캐서린에 대한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극복하는 것. 소설을 읽다 보면 콜린이 천재가 아니라도, 캐서린과 다시 이어지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집을 떠난 콜린이 겪고 있는 괴로움들은 청춘의 열병 같은 것이고 그 열병이 낫고 나면 콜린이 한 층 더 성숙한 인간이 되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안다.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더 콜린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열아홉 번째 캐서린에게 또 차이고 말았어>는 소소하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Posted by 김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