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20. 19:03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는 일을 잘 미루는 편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숙제나 과제를 항상 마감 직전까지 붙잡고 있곤 했다. 일을 시작하기까지 워밍업을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할 일이 많을 때는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는 바람에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기도 했다. 분명 금방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발목을 잡는 일도 허다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일 잘할 수 있다>는 일을 잘 하는 노하우를 모아 놓은 책이다. 사실, 일을 잘 하는 법에 대한 책은 한두 권이 아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자기계발서를 읽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책에서 하나라도 건질 수 있다면 다행이다.' 책은 책일 뿐이다. 아무리 옳은 말들을 늘어놓은 책을 읽어도 읽고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리고 옳은 말들을 구구절절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결국 이런 책은 읽는 사람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꽤 괜찮았다. 확실히 하나를 건질 수 있는 책이었다. 책은 크게 일 처리가 느린 이유, 일을 잘 하는 사람의 사고방식, 시간 절약법, 행동법, 그리고 생활 습관으로 나뉜다. 이 책의 팁들은 기본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을 타겟으로 쓰였지만, 공부나 집안일 등에도 응용할 수 있다. 

 

 가장 와 닿았던 내용은 먼저 처리할 일과 뒤로 미뤄야 하는 일을 구분하는 방법이었다. 저자는 업무의 긴급성과 수고로움에 따라 일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1. 긴급성이 높고 손이 많이 가는 일. 2. 긴급성이 높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일. 3. 긴급성이 낮고 손이 많이 가는 일. 4. 긴급성이 낮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일. 이렇게 두고 보면 당연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1번이고, 2번도 긴급성이 높으면서 빠르게 해치울 수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의 앞쪽에 둘 만 하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은 3번이다. 3번과 같은 일을 미루게 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긴급성이 높고 손이 많이 가는 일, 즉 1번이 된다. 이런 일은 '지금은 작아서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머지않아 거대한 괴물로 변해 우리를 괴롭힌다'. 특히 습관적으로 일을 미루는 사람이라면 더 주의해야 한다. 덧붙여 이 책의 1장을 보면 소제목 중 '마감일은 제출일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 문장을 읽은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은연중에 마감일을 제출일이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일어났던 수많은 해프닝들을 떠올리면, 역시 마감은 빨리 하면 빨리 할수록 좋다.

 

 하지만 마감을 빨리 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라면 이런 책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알아서 마감을 빨리 하고 일을 잘 한다면 일을 잘 하는 법에 대한 책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에도 말했지만 나는 일을 시작하기까지 워밍업을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유는 크게 의욕이 나지 않아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로 구분된다. 집중이 머리의 문제라면 의욕은 마음의 문제인데, 저자는 의욕에 관해 뇌 연구자인 이케가야 유지의 말을 인용한다. "의욕이 없어서 시작을 못 하겠다는 말은 '안 하는 사람의 변명'에 불과하다. 애초에 의욕은 처음부터 생겨날 수가 없다. 어떤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솟아나는 것이다." 즉, 하기 싫다는 생각을 그만두고 일단 시작하라는 말 되시겠다. 집중에 관해서는 자신만의 집중 루틴을 만들라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한 입 베어 먹으면 그 어떤 귀찮은 일도 바로 시작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의 음식'을 정하라는 것이다. 디저트를 좋아한다면 초콜릿이나 마카롱 같은 게 좋고, 에너지 드링크 같은 음료도 괜찮다. 집중이 필요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법의 음식을 먹는 걸로 몸과 마음에 신호를 주라는 의미다. 이 팁은 당장 내일부터 시험해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도저히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은 팁들도 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 카페에서 미리 일을 한다든가, 일을 게임처럼 즐긴다든가. 하지만 이런 방법들이 맞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직장인에게 일을 잘 하게 된다는 건 단순히 맡은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 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인생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일을 하며 보내기 때문이다. 즉 직장에서의 생활은 삶의 질에 너무나도 큰 영향을 끼친다. 스스로의 업무 능력에 회의를 느낀다거나, 좀 더 일을 잘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럼 나는 '마법의 음식'을 뭘로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해 봐야겠다. 

Posted by 김미류
2020. 7. 20. 15:57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지>는 아홉 명의 저자들이 각자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런 제목의 책을 손에 드는 사람이라면 아마 행복에 대해 깊이 고민해 봤거나, 행복해지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아홉 저자들은 사실상 접점이랄 게 딱히 없다. 성별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성장 환경도 다르다. 어떤 저자는 뱃속에 여덟 달 동안 품어 왔던 아이를 잃었다. 어떤 저자는 큰 병을 앓았고, 어떤 저자는 여러 번의 이혼을 경험했다. 어떤 저자는 어렸을 때 부모의 이혼을 겪으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들은 크고 작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음에도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행복이라는 개념이 그들과 독자들을 이어 준다. 

 

 이 책을 읽으며 '킨츠기'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킨츠기란 그릇 수선, 깨진 도자기를 메꾸거나 이어 붙이는 행위를 말한다. 흔히 마음을 도자기에 비유한다. 보통 한 번 깨져 버린 그릇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깨진 도자기도 수선할 수 있다. 그릇을 어떻게 수선하느냐에 따라서 깨지기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마음에 금이 가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스스로가 산산조각났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킨츠기 작가 나카무라 구니오는 저서 <킨츠기 수첩>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않을 때, 깨진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세상의 가치관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크고 작은 실수나 상처들이 우리를 깨지게 만들었다고 해서 깨진 마음을 평생 안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

 

 중간에 마음이 찔리는 내용도 있었다. 소제목은 '하고 싶은 일을 잘하는 방법'.

 1. 매일 보고 매일 그려라.

 2. 그림 그리는 친구 혹은 스승을 만들어라.

 3. 관찰하고 분석하고 실험하라.

 4. '그림, 한 달 안에 마스터하기!' 이런 건 없다. 그림 실력은 투자한 시간에 비례한다. 

 ...

 10.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은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게 한다. 첫발이라도 움직인 후에 걱정해보자.

 잘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림도 잘 그리고 싶고, 글도 잘 쓰고 싶고, 외국어도 잘 하고 싶고, 운동도 잘 하고 싶고.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매일 노력하기보다는 방 안에 가만히 누워서 '오늘 자고 일어나니까 갑자기 그림을 잘 그리게 됐으면 좋겠다.'하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게 생각만 해서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내용을 쓴 저자는 마음 속에 쌓인 부정적인 요소들을 배출하는 방법이 그림 그리기였다고 한다. 

 

 에세이를 읽는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재미있는 책이 읽고 싶어서,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 나는 이 책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지>라는 제목이 나를 잡아끄는 바람에 읽게 되었다. 뒷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오직 행복하게 살라는 한가지 의무만 있을 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헤르만 헤세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행복하게 산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행복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들을 하다 보면 어제보다는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나중에 언젠가는 행복해지기 위한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Posted by 김미류
2020. 7. 18. 01:14

 

 언제부터인지 에세이 읽는 걸 좋아하게 됐다. 물론 모든 에세이를 다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에세이들은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저자 최광기는 사회자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거리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의 힘으로 꽃은 핀다>는 저자가 수십 년 동안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면서 겪고 느낀 것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수많은 촛불집회는 물론이고 장애인 차별 금지 집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에 열린 수요시위, 노숙인 추모 문화제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목소리가 필요한 자리라면 어디든 빠지지 않는다. 저자가 얼마나 많은 걸 보고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왔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책의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고 머리를 비운 채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정도지만,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가볍지만은 않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다른 이들에게 말을 잘 하는 법에 대해 가르칠 일이 많았다고 한다. 김근태 전 장관의 연설 코칭을 맡기도 했고, 시 의원 출마 준비를 하는 환경미화원들에게 연설을 가르치기도 했다. 공무원 연수원에서 자기소개 실습 진행을 맡은 적도 있다. 실습을 할 때는 자기소개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살다 보면 가끔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다. 새로운 모임에 나갈 때라거나, 회사를 옮겼을 때, 모르는 사람을 소개받는 자리와 같이 말이다. 그럴 때마다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너무 뻔한 말만 떠오른다. 그렇다고 특이한 말을 해서 괜히 사람들의 눈 밖에 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다 보면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나서서 말을 하려는 사람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저자가 실습을 갔을 때도 어릴 적 회장 선거에 나가 떨어졌다가 어머니에게 "그러게 계집애가 그런 데 나가서 망신이나 당한다"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두려워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지금은 그 기억을 극복했기를 바랄 뿐이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자신의 의견이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리 있게 타인에게 전달하는 사람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다. 다소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울릴 줄 아는 사람도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닐까. 물론 사회 보는 일을 업으로 하는 저자는 두 가지 모두 해당될 것이다. 저자는 다른 사람에게 연설이나 말하는 법을 가르칠 때 먼저 그 사람의 장점을 봐 준다고 말한다. 일단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는 태도로 말할 수 있다면 그 다음 단계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심을 다해 세심하게' 칭찬하는 자세다. 진심이 담긴 구체적인 칭찬은 사람을 바꿔 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자신과는 같지 않다.

 

 사실 이 책에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들만 실려 있는 건 아니다. 읽기 괴로운 이야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야기, 왠지 모르게 화가 나는 이야기들도 있다. 그야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는 저자가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만을 겪을 수는 없기에 당연한 일이다.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의 사연을 읽다 보면 공감이 되기도 하고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진다. 그런 갑갑한 현실을 이겨 내도록 돕는 게 바로 연대의 힘, 저자가 말하는 목소리의 힘이다. 이 책의 제목은 <목소리의 힘으로 꽃은 핀다>인데, 여기서의 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불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을 바라게 된다. 

Posted by 김미류
2020. 7. 17. 02:14

 

 대부분의 독자들은 미나토 가나에를 <고백>으로 처음 알았을 것 같다. 나도 그랬다. 처음 한국어로 번역된 책들이 <고백>과 <속죄>였다. 미나토 가나에의 치밀하고 날카로운 이야기에 빠져 한동안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을 먹어치우듯이 읽었다. <왕복서간>, <경우>, <모성>, <소녀>,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유토피아>까지 내 기대에서 벗어나는 작품이 없었다. 나는 추리가 주가 되는 미스터리 소설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을 읽으면서 사건의 범인을 찾고 트릭을 밝히는 미스터리보다는 인물들의 감정과 동기에 주목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들 중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람과 사회 사이의 복잡한 문제들을 섬세하게 표현해 내는 작품들이 많다. 모성이 신성하고 절대적인 것이라는 편견에 반박하는 <모성>이나, 죄의식에 시달리는 이들의 삶을 서늘하게 그린 <속죄>와 같은 소설들이 그렇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고백>역시 (아주 납작하게 요약하자면)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조각들>은 외모 지상주의와 관련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한 소녀가 자살하고 미모의 성형외과 의사인 다치바나 히사노는 소녀의 주변인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는다. 죽은 소녀의 이야기는 아주 큰 퍼즐을 맞추듯 천천히 완성된다. 죽은 소녀는 히사노의 딸 뻘이고, 히사노가 자란 지역에서 자랐다. 히사노와 다른 이들의 대화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건 소녀의 이야기뿐이 아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외모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줄세우는 사람들의 모습, 그렇게 세운 줄에서 뒤에 서 있다고 평가받는 이들에 대한 주변의 멸시와 혐오, 저열한 악의에 대해 엿보게 된다. 멀쩡해 보이다가도 외모와 관련해서는 뒤틀린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인물들이 소름 끼치다가도, 그들의 모습이 현실과 그리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녀가 자살한 이유와 소녀 본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소설의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 소설 뒷표지에 인용된 몇 개의 문장만 봐도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대강은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모델처럼 예쁜 애라며?", "아니 학교에서 제일 뚱뚱하다고 들었는데". 당연히 자살한 소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외모가 당연히 그가 자살한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소설을 읽어 보면 죽은 소녀의 외모에 관해서는 생각보다 복잡한 일들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건 '예쁜 애가 자살했다', 혹은 '뚱뚱해서 자살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다.

 

 요즘 사회에서 개인이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외모 강박에서 벗어나기란 굉장히 어렵다. 온갖 매체에서 더 예쁘고 더 마른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과체중인 사람들에게는 '살을 빼면 예쁠/잘생겼을 것 같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칭찬이랍시고 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여학생들에게 취업을 하고 싶으면 성형수술을 하라고 말하는 교사가 정말로 있었다. 지금의 학생들이라고 얼마나 다른 말을 들을까. 머리로는 다들 이렇게 뒤틀린 기준에 맞춰 스스로의 외모를 검열할수록 사회는 점점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향할 거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외모의 선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부당한 일을 겪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외모 강박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옳은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조각들>의 띠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키가 큰 것도 작은 것도, 뚱뚱한 것도 마른 것도, 눈이 큰 것도 작은 것도, 코가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전부 표면적인 개성일 뿐 그걸로 전부를 판단하는 건 천박한 행위라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게 될……리가 없죠." 

 

 하지만 이대로 모두가 외모 강박의 굴레에 갇혀 영원히 고통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분명히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지언정 분명히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남들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깨닫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부끄럽지만, 나도 아직은 외모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신경이 쓰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서서히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익숙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부분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이게 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더 긍정적인 쪽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조각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라는 조각이 딱 들어맞는 장소는 반드시 있으니까요."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말을 하는 사람의 존재가 꺼림칙하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문장으로 훈훈하게 끝맺기에 이 이야기는 너무 잔인하다. 하지만 잔인함에도 눈을 돌릴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다른 소설들이 대개 그렇듯, 이 소설 역시 그렇다. 

Posted by 김미류
2020. 7. 14. 01:18

 

 예전에 살던 동네로 돌아가 있는 꿈을 자주 꾼다. 가장 오래 살았고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동네다. 지금은 거기서 떠나오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직도 거기가 내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손보미의 <작은 동네>는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나'는 일본어 번역을 하고 연예 기획사에서 일하는 남편과 함께 산다.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 법한 생활을 하던 '나'는 어머니를 병으로 떠나보내고,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오래 전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거기에서부터 주인공의 일상이 조금씩 흔들린다. 소설의 꽤 많은 부분은 주인공이 살았던 작은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 할애된다. 작은 동네에서 조금 특별한 취급을 받았던 '나'의 가족, '나'를 이상할 정도로 과보호했던 나의 어머니, 개를 키우고 싶었던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이웃집 개 누렁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유일하게 사귀었던 친구의 이야기까지.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작은 동네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린 아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는다. 특히 아이들은 스스로가 평범함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나와 얼마나 다른지에 항상 집중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언제나 딸과 등교를 함께 하고, 딸이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딸을 데리러 간다. 단소를 잘 부는 딸이 대회에 나가려는 걸 방해한다. 딸이 수영 강습을 받을 때조차 유리창 바깥에서 딸이 수영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소설 중후반에 나오는 단 한 명의 친구를 제외하면 그는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는다. 자연히 '나' 역시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리지 못한다. <작은 동네>를 읽으며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인물은 역시 이 어머니였다.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딸을 조금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 어떤 일들을 방해한다. 사실 수많은 어머니들이 딸을 사랑하면서도 딸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처음에는 이 소설이 그런 종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딸을 억압했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와 머물렀던 작은 동네에 매여 있던 주인공이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이야기 말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어머니와 작은 동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만 여기에는 쓰지 않는다.

 

 어린아이인 '나'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막연하게 느낄 뿐이다. 어머니의 예민하고 변덕스러운 태도를 그저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친구가 보이는 기묘한 모습을 그저 받아들이고,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떠났다는 사실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음에도 그 이상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그 상황을 해결할 수도 없다.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마음 한 켠에 굳게 잠긴 방을 가지고 있다. 어른이 된 '나'는 어렸을 때의 자신이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하나 깨닫고,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되새기고, 진실을 찾아 나섬으로써 그 방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때로 조마조마했다가, 때로는 안타까웠다가, 마지막에는 '나'와 함께 잠긴 방을 열게 된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 한동안 이 책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현재를 붙잡는 과거가 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벗어나서 살아갈 수 있을까? 작은 동네를 떠올리는 주인공을 보며 나 역시 내가 자랐던 작은 동네에 대해 떠올렸다. <작은 동네>는 인간이 과거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살았던 작은 동네를 떠올리지 않을까. 그 작은 동네에서의 기억들이 현재의 우리를 너무 괴롭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Posted by 김미류
2020. 7. 10. 14:43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걸까? 내 부모 세대까지만 해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그렇다'였다. 가끔 다들 어떻게 그렇게 당연하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 건지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좋은 의미로도 그렇고, 나쁜 의미로도 그렇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내 부모는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 그 나이에 어떻게 결혼을 하고 나를 가질 생각을 했을까? 오랫동안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 역시 결혼의 이유였겠지만,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내 부모는 결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부모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으리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것과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로 생각하는 건 아예 다른 일이다. 요즘에는 점점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개인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사회경제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예전과는 달리 결혼이 인생의 필수 코스가 아니라 선택 가능한 옵션이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합리적 비혼주의자로 잘 살게요>의 저자 역시 비혼주의로 삶의 노선을 정했다. 정확히는 '비무일'(비혼, 무자녀, 1인 가구)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비무일'로서의 삶, 비혼주의자로 살아가기로 한 이런저런 이유들, 비혼주의자로 알차게 잘 살아가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 책의 내용과 관련된 통계들이 첨부되어 있다. 

 

 비혼주의자라고 하면 주변에서 꼭 하는 말들이 있다. 나중에 늙어서 외롭지 않을 거 같아? 아프면 수발은 누가 들어 줘? 이런 말들이다. 저자 역시 그런 말을 한두 번 들어 본 게 아닌 모양이다. 결혼 상대와 자녀를 나중에 내 수발 들어 줄 사람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잘못됐다는 것부터 지적해야겠지만, 그런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를 해 봐야 한도 끝도 없다. 저자는 '마르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마르코는 수십 년 뒤에 개발될 고성능 AI 집사 로봇이다. 지금의 인공지능 스피커가 수십 년 후에는 더 발전하고 정교해지지 않을까. 노년의 외로움이나 불편함을 해결할 만한 기술들도 더 많이 나올 것이다. 지금을 기준으로 수십 년 후를 생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찬가지로, 저자는 수십 년이 지나면 부상이나 질병이 지금처럼 사람의 발목을 잡지 않을 거라고 예상한다. 벌써부터 노년에 내 병 수발을 들어 줄 사람이 없다는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연애나 섹스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한다. 자신은 연애와 섹스가 간절하고 애인이 늘 고팠던 시기를 거쳐, 안정적인 장기 연애를 꿈꿨던 시기를 지나 지금에 다다랐다고 한다. 그러나 수십 년 장기 연애의 꿈은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너무 과도하게 의존하려 들거나, 무기력 비관주의이거나, 다른 건 다 좋다가도 여성주의 입장에는 유독 심한 거부감을 표현한다든가, 바람기를 보인다든가, 때론 같이 있을 수 없게 상황이 너무 어긋나는 등의 이유가 있었어요.' 연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정적인 장기 연애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지 않을까. 항상 애가 타고 불이 타지는 않더라도 서로를 따뜻하고 든든하게 지지해 줄 만한 파트너와의 관계. 하지만 확실히 그런 것도 영 쉬운 게 아니다. 사람을 오래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의 결점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물론 누구나 결점이야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절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결점도 있는 법이다. 저자는 파트너와의 관계 맺는 노하우를 이야기하면서 내 인생은 나만의 인생이라는 걸 잊지 말자고 강조한다.

 

 <합리적 비혼주의자로 잘 살게요>의 특징은 구어체로 쓰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치 저자와 직접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비혼주의, 연애, 섹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망설임 없이 털어 놓는 이 책은 일단 꽤 재미있다. 뒷표지를 보면 어떤 사람들에게 이 책이 필요한지를 적어 놓은 체크리스트가 있다. 그 중에 이런 문장들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남의 인생 조연 말고 내 인생의 주연으로 살아야 행복하다.', '연애에만 다 걸지 않고 내 원래 인생도 계속 관리하는 균형감을 원한다.' 자기 인생을 꾸리며 연애도 잘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Posted by 김미류
2020. 7. 9. 01:26

 

 

 서점에 나가 보면 부동산에 대한 책들이 참 많다. 부동산에 투자해서 큰 이익을 거두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 온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아파트를 사고, 자산으로서의 부동산에 투자할 여건이 되지는 않는다. <생애최초주택구입 표류기>의의 저자는 책에 의하면 '평균 임금 생활자'다. 대한민국에서 물려받은 자산이 없는 평균 임금 생활자들은 보통 서울 안에 있는 아파트를 살 수 없다. 자산으로서의 부동산이라는 걸 가질 수도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가 찾는 건 투자 대상으로서의 부동산이 아니라 실제로 살 집이다. 어머니와 둘이 살던 저자는 어머니가 거주할 집을 사고 자신은 월세를 얻어서 독립할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저자는 빌라를 구입하고 오피스텔에서 월세를 내며 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왜 집을 살 거면서 또 월세를 내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저자에게 그런 지적을 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 역시 자신만의 생각이 있고 삶의 우선순위가 있다. 빌라를 사고 자신은 오피스텔로 독립하기로 한 저자의 선택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여튼 빌라를 사기로 마음먹은 저자는 여러 가지 장벽을 마주한다. 우선 실거주 목적의 빌라를 구매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이야기하는 책들은 거의 없었다. 세상에는 분명 자신이 살아야 할 빌라를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을 위한 안내나 팁은 거의 공유되고 있지 않은 셈이다. 이 책은 실거주 목적의 빌라를 구입할 사람들을 위한 정보는 물론이고, 집과 공간에 대한 저자의 경험들, 그리고 독립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집을 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집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가격이 괜찮고 깔끔하면 교통이 심각하게 안 좋다. 역세권에 가격이 싼 집은 사람이 살라고 만들어 놓은 집이 아니다. 깨끗하고 역에서도 가깝고 넓은 집은 당연히 무서울 정도로 비싸다. 저자와 어머니는 많은 집을 둘러보고, 많은 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흥정을 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집을 산다는 걸 두려워하기도 하고 서로 감정이 상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집을 산다는 건 사람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가져다 주는 과정의 연속이다. 저자에게 집을 산다는 건 '전 재산을 다 끌어오고, 거기에 대출받을 수 있는 돈까지 다 긁어모아야 하는'일이다. 월세나 전세로 살 집을 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월세나 전세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생활의 고단함은 별개의 문제지만. 한정된 자원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저자의 모습이 남 같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힘들고 피곤한 내용만 실려 있는 건 아니다. 이 책이 단순히 내 집 마련에 대한 현실을 일깨워 주기만 하는 책이었다면 나는 재미있게 읽지 못했을 것이다. <생애최초주택구입 표류기>의 제목은 왜 '표류기'일까. 표류기라는 말은, 나를 포함해서 자리를 잡을 만한 좋은 집을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헤매며 떠도는 사람들의 삶에 퍽 잘 어울린다. 이 책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편히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내가 원하는 물건들로 채울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나의 공간. 세상에 그런 공간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런 공간을 찾아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며 읽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공간에서 살 수 있기를. 자신에게 허락된 집이 없어 불안해하지 않기를 바라 본다. 

 

 

 

 

 

 

 

 

Posted by 김미류
2020. 7. 5. 12:47

 철학은 먹고 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학문으로 여겨진다. 철학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낮잡아 보는 시선도 팽배하다. 왜 그럴까? 아마 철학이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철학 같은 건 몰라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철학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학문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게 잘 사는 걸까?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인기를 누리면 잘 사는 걸까? 분명한 오답은 있을지 몰라도 아마 정답은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씨,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는 소크라테스 철학을 통해 스스로의 사고를 확장시키고 자신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에 대한 책이지만 복잡하고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어떻게 하면 철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야기하므로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 철학은 '한계 없는 물음'을 통해 대상을 깊이 파고든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해결하고 싶다면, 행복이란 뭘까? 정신적으로 풍족한 상태가 행복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적으로 풍족한 상태인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와 같이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신적으로 풍족한 상태를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아무런 고민거리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고민이란 뭘까?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다 보면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생각하는 과정에서 답을 찾지 못할 가능성도 높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저자가 말하는 철학적 사고의 기초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답할 제대로 된 근거를 찾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건 자연스럽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기술이 부족함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때 우리는 더 나은 수준의 기술을 얻는 일에 몰두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은 우리를 앎으로 나아가게 한다." 철학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고민들이 갑자기 술술 잘 풀리지는 않는다. 혼란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씨,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는 철학 입문서다. 소크라테스 철학을 쉽게 마주하는 방법뿐 아니라 철학사 공부를 시작하는 법에 대해서도 알려 준다. 책에 따르면 철학사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주된 물음은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가치론 세 가지다. 여기에서 존재론이란 '있음'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명이란 있을까?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분명 다르지만, 생명이 있고 없음에 따라 그 두 가지가 구분되는 것일까? 이런 물음들은 존재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인식론이란 "인식론은 오랫동안 생각의 내용을 뜻하는 믿음, 거짓이 아닌 참, 참이 되게 만드는 근거와 검증으로서 정당화에 관한 문제를 다뤄왔다." 즉 앎을 주제로 하는 물음들이 인식론에 속한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치론이란 말 그대로 의미와 가치에 대한 물음을 다룬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의미 있고 무엇이 의미 없는지, 어떤 게 가치 있는 삶인지와 같은 물음들은 가치론의 영역에 속한다. 

 

 사람들은 보통 철학을 어렵게 생각한다. 철학에 관심이 있어 공부하려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 씨,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는 정말 내가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보도록 도와 주는 책이다. 철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지금까지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Posted by 김미류
2020. 7. 3. 17:59

 

 이건 내 이야기다. 아니, 우리의 이야기다.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을 했다. 내 이야기거나, 내 친구의 이야기거나, 건너 들은 어떤 여성의 이야기거나, 뉴스에 나온 다른 여성의 이야기라고.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임에도 감당하기는 힘든 일들이 있다.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차마 듣지 못하겠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런 일을 겪는 여성들은 곧 나 자신과 같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서련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이런 말을 한다. "이 이야기들이 남의 일이었으면 좋겠다. 작가와도 독자와도 상관없는 세계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을 그린 것이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들이 우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을 외면할 수 없을뿐더러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정아와 지현, 정정은 씨, 영진, 윤정화, 지윤, 화정, 수연, 그리고 숙이. 이들은 어딘가에서 정말 살아 숨쉬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이 문제작이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문학은 현실을 비춰 보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동창에게 다단계 사기를 당하고 갈 곳을 잃어버리거나, 오랜 시간 뒷바라지를 해 온 애인에게 버림받거나, 믿고 사랑했던 애인이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공중화장실에서 낯선 남자를 마주친다. 위에서 질리도록 말했지만 이런 일들은 정말 일어난다.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쓴 소설이 어째서 문제작인가. 하지만 사람들이 이 소설을 문제작이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 것 같다. 아직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작가를,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을 '밋밋할 정도로 평범하다'라고 말했다. 소위 말하는 '불행 포르노'로 소비될 만한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지극히 밋밋할 정도로 평범한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듣고 싶지 않아한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계에서 이 소설은 당연하게도 문제작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나서 너무 과장한 게 아니냐고 할 게 뻔하다. 이런 여자가 어디 있냐고, 이런 남자가 어디 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여성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많은 책들 역시 그런 평가를 받아 왔다. 물론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들은 애초에 이 책을 읽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단편이 인상적이었다. <정정은 씨의 경우>의 주인공 정정은 씨는 어떤 일을 겪고 나서 성격이 뒤틀려 버린다. 정정은 씨는 자신이 야비한, 마음이 썩어 버린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독백한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음흉한 사람이 되었을까. 타인의 불행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되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정정은 씨는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고 상처를 줬다. 정정은 씨를 그런 사람으로 만든 이들은 정정은 씨에 대해서 생각하기나 할까. 자신이 마음과 시간, 돈을 쏟아부은 대상에게 배신당하는 여성들을 누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여성들이 자신보다 힘 없고 약한 다른 여성들을 가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에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는 그다지 훌륭하거나 멋지지 않은 여성들도 많다. 어떤 여성들은 어딘가 좀 이상해 보이기까지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상한 여성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었다. 세상에는 멋지고 훌륭한, 남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여성들뿐 아니라 뭔가를 성취하지 못하거나 어딘가 이상하거나 비열한 여성들도 많이 살아가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도 해 줬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집을 읽어 봤으면 좋겠다.

Posted by 김미류
2020. 6. 30. 22:39

 복잡한 감상을 품게 만드는 소설이다. 걸리는 데 없이 휘리릭 잘 읽히긴 한다. 다만 좋게 말하면 고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진부한 설정들이 좀 있다. 소설에는 너무나 예뻐서 전교생은 물론 중학생들에게까지 주목과 동경을 받는 어떤 소녀가 나온다. 모두가 아는 그 소녀에게 주인공인 평재만 관심이 없다. 주인공의 곁에는 여자 애들의 정보를 꿰고 다니는 친구가 있고, 그 친구는 주인공에게 어떻게 그 애를 모를 수가 있냐고 경악한다. 그 여자 애는 자신에게 고백한 많은 남자들을 전부 다 차 버렸고, 어느 날부터 갑자기 주인공과 엮이게 된다. 그 밖에도 조금 뻔한 이야기가 좀 나온다. 축구부 주장을 따라다니면서, 주장이 좋아하는 여자 애를 째려보는 여자 팬 클럽이라거나. 다른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듣는 '학생회장'과 그 학생회장에게 음료수를 따라서 가져오는 1학년 여학생 같은 것. 이미 나는 오래 전에 청소년 시절을 지나오긴 했지만, 요즘의 청소년들에게 이런 소재나 묘사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 예쁜 소녀의 별명은 '두 마디'인데, 주인공은 '두 마디'와 몇 번의 대화(사실 대화도 아니다)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두 마디'에게 차인 모든 남학생들에게 복수를 당한다. 작중의 묘사에 따르면 두 마디는 자신에게 고백하는 모든 남자들에게 싫다는 말로 거절을 고했다고 한다. 주인공이 두 마디와 사귄다는 것 자체가 사실이 아니지만, 주인공이 두 마디와 사귀든 말든 두 마디에게 차인 남자들에게 주인공을 괴롭힐 자격이 있단 말인가? 그런 부조리한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행동도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 

 

 너무 부정적인 평가만을 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마음이 복잡해졌냐, 하면 이 소설에는 확실한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학교 생활을 다룬 부분이나 두 마디라는 여학생의 존재가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다. 이 소설에서 좋다고 느꼈던 부분은 거의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온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이산 가족 상봉을 기다린다. 아침마다 산을 오르고 주말마다 봉사 활동을 다니는 그는 몸도 마음도 건강한 노인이다. 주인공은 할아버지를 따라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도시락을 나눠 주고,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집을 고쳐 준다. 독자는 그런 주인공과 주인공의 할아버지를 따라 외롭고 힘든 이들이 사는 동네로 찾아간다. 이 소설의 제목인 <지옥 만세>에서 알 수 있듯 어떤 이들에게는 삶이 지옥이다. 그들은 살 곳을 잃고 쫓겨나 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처한다. 작고 허름한 방에 살면서도 스티로폼 박스에 채소를 기르는 누군가의 삶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치워 버려도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주인공은 그들보다 안온하게 살아가지만 그들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 지옥 같은 세계일지언정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 소년은 누군가에게서 함부로 대해지는 소녀를 만난다. <지옥 만세>에는 연대와 공생이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가치가 녹아 있다.

 

 호불호가 갈릴 법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하지만 확실히 가볍게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두 마디'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는 소녀, 유시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소설 안에는 시아가 갖는 감정의 흐름, 시아의 삶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신비스럽고 아름답지만 강한 소녀, 이런 말로만 수식하고 끝내기에 시아는 아까운 캐릭터다. 어쨌든 세상의 모든 시아와 평재가 너무 힘들지 않은 청소년 시절을 보내길 바란다. <지옥 만세>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지옥을 헤쳐 나가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모두의 삶이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누구의 삶도 지옥 같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김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