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21. 22:02

 

 엄밀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 쓰레기는 없다. 아무도 그 의미를 알아봐주지 못할 뿐이다. 이 소설, <죽은 눈의 소녀와 분리수거 기록부>의 성지은이라는 인물이 하는 말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이 쉽게 버려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마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언제든지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거나, 너무나도 쉽게 쓸모 없다고 낙인찍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사람들이 '잉여 인간'이나 '인간 쓰레기'라는 말을 자조적으로 쓰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죽은 눈의 소녀, 성지은은 그런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세상에 쓰레기란 없다고, 보기 나름이라고 말한다. 무기력하고 스스로가 싫어지는 경험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모든 이들이 바쁘게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 사회에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럴 때 누군가가 너도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고, 지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건 그저 마음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은 눈의 소녀와 분리수거 기록부>는 그렇게 말해주는 소설 같았다.

 

 <죽은 눈의 소녀와 분리수거 기록부>는 버디물이라고 소개되었다. 위에 언급된 성지은, 그리고 사실상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마동군'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된다. 마동군은 유망한 발레리노였으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입으면서 발레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상처를 안고 있다. 기본적으로 덤덤한 성격의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패한 뒤 일본에서 한국으로 도망치듯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야기는 그런 마동군이 괴짜 발레리노인 아버지 '마리아노'를 통해 성지은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전개된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아지트가 있다. 아지트는 크게 '매립지' 그리고 '정신과 분노의 방'으로 나뉜다. 정신과 분노의 방은 작중에서도 언급되듯 드래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의 패러디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컵이나 가전 제품과 같은 물건들을 파괴하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매립지란 과거의 여한과 괴로움을 묻어 버리는 곳이라고 설명된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소다. 사람들은 매립지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하고, '연구'를 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개인적으로는 매립지란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매립지는 중요한 설정이지만 대부분의 사건들은 매립지 밖에서 일어나는데, 마동군과 성지은이 매립지 밖에서 해결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적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다. '미스터리 하드보일드 버디물'의 줄거리를 하나하나 자세히 서술하는 것처럼 매너 없는 서평이 또 있을까. 그리고 매립지는 이 소설의 주제의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꼭 길게 언급하고 싶기도 했다. 

 

 손지상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가볍고, 발랄하고, 유쾌한 작품이 되기를 바라면서 썼다고 말했다. 딱 그대로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소설이다. 혹시라도 '가벼운 소설'이라는 말이 소설을 폄하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첨언하자면, 나는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어내려갈 수 있는 소설을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이 소설로 손지상 작가에게 입문한다면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 온도 차이 때문에 당황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읽는 사람을 당황시키는 것도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의 '성지은'은 '성남시 분리수거 소녀' 였던 '성지영'에서 따 온 캐릭터다. 그리고 '흑역사'라는 말은 <턴에이 건담>에서 유래되었다. 

 

 

Posted by 김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