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설에 빠졌던 시기가 있다. 그 때 일본인들은 추리소설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온갖 배경과 상황을 가지고 추리소설을 쓰고,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 어려운 소설들에도 추리 요소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위즈덤하우스 출판사에서 <해러스먼트 게임>의 가제본 서평단을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 한때 일본 소설들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나서 신청을 했더니 책을 받을 수 있었다. <해러스먼트 게임>은 내가 왜 일본 소설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읽었는지 기억을 되살리게 해 주는 소설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주인공과 그 동료들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독자의 추리를 유도한다. 그런 전개 방식이 독자로 하여금 앞으로 이어질 내용이 궁금해서 책장에 손이 가고, 자꾸 뒤를 더 읽어보고 싶어지도록 만든다.
주인공인 아키쓰는 '마루오 홀딩스'라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 본사의 유망한 인재였지만 '파워 해러스먼트', 즉 사내 괴롭힘 행위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지방으로 좌천당한 신세다. 그 아키쓰가 갑자기 본사에서 괴롭힘 문제를 비롯한 사내 문제와 고충들을 해결하는 컴플라이언스실로 발령받으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사장의 인사 발령으로 인해 본사로 돌아오게 된 아키쓰는 젊고 열정적인 부하(부하지만, 아키쓰는 자신에게 컴플라이언스실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선배'라고 부른다) 마코토와 함께 이런저런 사내 문제들을 해결하러 다닌다. 아키쓰는 일본 소설에서 그리 드물지 않은 타입의, 겉으로는 가벼워 보이지만 속을 알기 어려운 중년 남성 캐릭터다. 컴플라이언스실 소속이면서도 다른 직원들에게 지나치게 편안한 언행을 보여 마코토를 당황하게 하기도 하고, 뒷수습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일을 밀어붙이기도 한다. 책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아키쓰가 큰 계획이나 치밀한 계산 없이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마코토는 성실하고 유능한데다 정이 많은 여성 사원이다. 포부가 커서 장차 부장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위태로운 순간들을 겪으면서도 곧잘 사건들을 해결해 나간다.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에서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주인공인 아키쓰의 좌천에 대한 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키쓰는 믿었던 후배에게 사내 괴롭힘의 가해자라는 내용의 고발을 당하는 바람에 커리어가 크게 틀어지고, 그 후배인 와키타는 본사에서 계속해서 승승장구해서 상무이사의 자리에 올라 있다. 내용을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 역시 소설에 재미에 더하는 요소 중 하나다. 그 외에도 매력적이지만 어딘가 수상한 와키타의 비서 미나코, 세련된 감각과 현대적인 안목을 가졌지만 그런 자신의 장점들이 슈퍼마켓 체인이라는 가업과 어울리지 않아 곤란을 겪는 마루오 사장 등 재미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작중에는 괴롭힘 행위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이 나온다. '파워 해러스먼트'는 '파워하라'라는 줄임말로 쓰인다. '커스터머 해러스먼트', 즉 손님에 의한 악질적인 괴롭힘은 '카스하라', 나이에 따른 차별이나 괴롭힘을 말하는 '에이징 해러스먼트'는 '에이하라'같은 말로 줄여 사용되는 모양이다. 성희롱은 물론이고,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게 하는 괴롭힘이나, 육아를 하는 사원에게 가하는 괴롭힘을 가리키는 단어도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예시들을 보면서 직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괴롭힘에는 정말 많은 종류가 존재하는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당연히 현실에서도 이런 괴롭힘들은 존재한다. 아마 더하면 더했지 소설보다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현실에는 아키쓰처럼 괴짜지만 유능한 컴플라이언스실 실장도 없다. 수많은 괴롭힘을 당하거나 목격하면서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소설에 공감하기 더 쉬우리라. 그렇다면 이 소설에 공감하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의미가 되나? 현실의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도 않을뿐더러 소설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괴롭힘 없는 직장 생활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누군가는 <해러스먼트 게임>을 통해 한 숨 돌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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