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29. 18:22

 

 한국에서는 거리에서 장애인을 마주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장애인인지 비장애인인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공공장소에서 휠체어에 타고 있거나 기타 보조 기구들을 사용하는 장애인들을 보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장애인들은 분명 존재하고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 텐데, 그들은 어디에서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책은 장애인의 성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애인들 역시 비장애인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것들을 욕망한다. 장애인들도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사랑하고 싶어할 수 있으며 성적인 욕구 역시 가질 수 있다. 이런 말들은 너무 당연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장애인의 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시화되지 않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장애인들은 성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편견, '선하고 욕심 없는, 무해한 장애인'의 이미지로 장애인을 소비하려는 시도, 장애인 당사자들의 포기와 체념 등 다양한 이유들이 언급된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누군가의 욕망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그저 억압하기만 하는 일은 결코 옳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의 성과 관련된 담론들을 살펴보면 모든 문제들이 그렇듯 한쪽의 의견만 일리가 있다거나 완벽한 해결 방법이 있는 상황은 없다. 책에서 언급된 예시를 보자. 지적장애가 있는 여성 역시 성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적장애 여성이 타인과 완벽히 원하고 동의하는 성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지적장애 여성의 성욕을 해결하게 해야 한다고 함부로 주장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지적장애 여성이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을 통계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뇌성마비 장애인 여성의 성과 사랑을 다룬 한국 영화 <오아시스>는 장애인 여성의 성과 사랑을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장애인인 여성 주인공이 자신을 강간하려던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전개를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다. <오아시스>의 의의를 주목하는 의견과 비판점을 주목하는 의견 모두 들을 가치가 있다. 확실한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성과 사랑에 대해서 오가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흔히 장애인은 무성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장애인의 성에 대해서 그나마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들은 남성 장애인들의 성욕을 해결할 방법에 대한 논의 정도이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에서는 많은 이들이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꺼낸다. 사랑하는 장애인들, 타인과 성적인 관계를 맺고 아이를 가지는 장애인들, 장애인의 자위 행위, 여성 장애인들의 성욕, 그리고 장애인들(주로 남성 장애인이다)의 성욕을 해소해 주기 위한 봉사 이야기와 그러한 봉사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대한 논의마저.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장애인의 성이나 사랑에 대해 접한 컨텐츠는 <오아시스>가 거의 전부였다. 물론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이전에 깊이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이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들이었다. 

 

 해외에서는 장애인들의 성욕 해소를 돕는 성 봉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국가들도 있는 모양이다. 성 봉사에 대한 견해는 첨예하게 대립된다. 장애인들 또한 성욕을 해소할 창구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타인이 성욕을 해소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장애인에 대한 모욕이라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 또한 성 봉사의 대상은 흔히 남성 장애인이며, 여성 장애인은 성 봉사 담론에서조차 소외된다는 지적도 있다. 저자 역시 가볍게 어떤 것이 옳거나 그르다는 판단을 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 명확하게 결론이 내려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책 속 이야기들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성에 대해 공론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다. 비장애인이 성욕을 느끼고 사랑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장애인도 성욕을 느끼고 사랑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로 하고 책으로 펼쳐 내야만 하는 이유는, 그 사실이 아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은 아무도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이다. 생각할 여지가 아주 많은 책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 보면 좋겠다.

Posted by 김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