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적인 것들이 언젠가부터 오그라든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난 사실 '오그라드는' 것들을 퍽 좋아하는 편이다. 누군가의 감성을 오그라든다는 말로 깎아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굳이 왜 저럴까,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게 놔 두면 될 걸, 괜히 남들이 좋아한다고 표현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자기가 쓴 글로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걸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저자인 최유리는 오래 전부터 써 왔던 가사들을 묶어 시집을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이 책이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저자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모든 글들이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로 쓰여 있다는 것이다. 영어를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국어와 영어 표현을 비교해 보며 읽는 재미도 있다.
예를 들면 이 책에 실린 시 중에 <글을 쓴다는 건>이라는 시가 있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시 중에 하나였다. 이 책은 시집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옮기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한국어 버전과 영어 버전을 비교해 보기 위해 그 시의 첫 번째 연만 여기에 옮겨 보고자 한다.
글을 쓰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펜의 위력을 느끼며 한편으론
잘못 쓰여지면 속히 버리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이 연의 영어 버전은 다음과 같다.
Writing takes courage.
I feel the power of the pen.
If it is written incorrectly,
discarded quickly.
That's also courage!
읽을 때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한국어 버전이 조금 더 담담하고 정적인 느낌이라면, 영어 버전은 조금 더 쾌활하고 밝은 느낌이라고 할까. 이렇게 두 가지 언어로 시를 읽어볼 수 있어서 신선했다.
저자가 오랫동안 써 온 글들을 한 번에 모은 것이기 때문에, 저자가 우울했던 시기에 쓴 시도 있고 행복했던 시기에 쓴 시도 있다. 그런 시들이 시간상의 순서와 관계 없이 섞여 있는 것도(저자의 의도이다) 특이하다. 감성적인 시도 있고, 무던한 시도 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무릎을 탁 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시도 있다. 이 책은 시집이기도 하지만 긴 시간을 아우르는 한 사람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자의 감성을 얼핏 엿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로 어렵지 않고 누구나 쉽게 읽고 느낄 수 있는 시들이라서, 읽고 싶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싶은 만큼 읽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할 수 있다. 시만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들도 함께 실려 있는데, 사진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사진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저자의 의도대로 '하던 일을 멈추고 시집을 대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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