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오직 달님만이>는 환상적이면서도 로맨틱하다. 이 이야기는 주인공 모현의 모험 이야기이자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범생처럼 일반적인 모험 이야기의 요소들(주인공의 위기, 조력자, 과거에 행했던 선을 보답받는 것, 타락한 인물, 주변인의 배신 그러나 참회와 죽음 등)을 사용하고 있으나 뻔하지 않다. 이 소설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인공은 죽거나 크게 다치지도 않고, 위기를 해결하며 결국은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때로는 흐뭇한 마음으로 모현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에도 마음 속 한 켠에는 지울 수 없는 불편함이 남아 있었다. 희현의 일생 때문이다.
사실 모현은 선한 인물이기는 하나 아주 강하거나 현명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모현의 장기는 활 쏘기라고 하는데, 작중에서 모현이 꼭 필요할 때 목표물을 맞추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모현은 감정에 솔직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할 줄 아는 매력적인 주인공이지만 영웅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에 더 가깝다. 그러나 희현은 현명하고 강했으며 또한 인내할 줄 알았다. 희현이 모현에 비해서는 물론이고, 모현과 떼어 놓고 생각하더라도 걸출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여러 번 드러난다. 자매의 어머니가 희현에게 남긴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너를 품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작다. 안타깝구나. 네가 사내아이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그 머리를 곳간 속 낱알을 헤아리며 썩힐 수밖에 없다니. 꼿꼿한 그 성정이 네게 해를 입힐지도 모르겠다. 딸아, 내 말을 명심해야 한다. 화를 억누르다 못해 그것에 도리어 잡아 먹혀버려서는 안 돼. 자신을 상처 입히지 말아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129p
희현은 너무 많은 것을 짊어져야만 했다. 어렸을 때부터 제멋대로 행동하는 동생을 자신보다 더 위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동생과 단둘이 외딴 섬에 버려진 이후로는 자매의 생활을 혼자 책임지다시피 했다. 모현은 어린아이니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희현과 모현은 고작 두 살 터울의 자매였다. 모현이 어린아이였다면 희현도 절대 어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혼자 세상과 맞서기에는 한없이 어리고 무력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현은 결국 해낸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악의가 자매를 집어삼키려 하기 전까지는, 힘든 노동을 하고 형편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자매의 삶을 지켜낸다. 물론 희현이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하면서 아무렇지 않았을 리 없다. 인내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한들 언제까지나 모든 것을 참고 삼킬 수는 없으니까.
그런 희현이 동생에게 자기 대신 산제물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것을 부당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모현이 무력한 어린아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희현이 말한 것처럼 모현은 희현에게 기생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제까지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 온 희현에게도 지키고 싶은 존재가 생겼다. 바로 아들이다. 오랫동안 양보하고 인내하며 살아 온 희현은 아들을 지키고 키워 내기 위해 더 이상 무턱대고 모든 걸 양보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희현이 바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나 비인간적인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희현은 자기 대신 죽게 된 동생에게 어머니가 남긴 칼을 보낸다. 하지만 칼만 보낼 뿐 제대로 마음을 보내지는 못한다.
"동무에게서 장도를 전해 받은 동생이 차마 밝히지 못한 자신의 진심을 읽어주기를 고대하는 수밖에. 그것이 모현을 위해 희현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실토하지 않은 내심이란 무의미할 뿐임을, 그 같은 고집스러움이 스스로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 것임을 알지 못한 채."
131p
희현이 실토하지 못한 내심은 떠나는 동생에게 전하는 미안함과 고마움뿐이 아니었다. 희현은 그 어떤 감정도 제대로 실토하지 못한 채로 점점 망가져 간다. 마지막 남은 약과를 먹는 동생을 보며, 동생이 고르고 남은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복주머니를 바꿔 가며 희현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까. 고통스럽게 일해서 동생을 먹여 살리고 원치 않는 결혼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분명 작은 씨앗 같은 크기로 시작되었을 동생에 대한 미움은 희현의 안에서 점점 커져 증오와 질시, 저주가 된다. 희현의 어머니가 걱정한 대로 계속해서 억누른 화가 희현을 집어삼킨 것이다.
이야기를 어느 정도 읽다 보면 희현이 행복해지기 어렵겠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너무나 많이 저질러서, 상투적인 표현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희현을 마냥 미워하기는 힘들었다. 모현이 솔직하고 선한 인물이었던 건 결국 자매의 어머니가 말한 대로 '철없고 이기적인' 시절을 마음껏 거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현이 없었더라면 모현은 그렇게 보호받으며 살아오지 못했으리라. 자매는 함께 살아왔지만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지지 않았다. 더 많은 짐을 지고 걸어온 사람이 빨리 지쳐 쓰러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희현이 혼자 그렇게 많은 것들을 짊어지지 않았더라면 자매는 더 오랜 시간 함께 걸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모현과 다른 매력적인 인물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으나 너무 희현에 대한 이야기만 줄줄 쓰게 되었다. 시간과 의지가 허락한다면 한 번 더 감상을 남기고 싶은 책이었다.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언니를 잃은 땅에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모현이 때로는 철없고 이기적이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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