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11. 21:28

 어린 시절의 기억들 중에 아름답다고 할 만한 것들은 거의 없다. 나를 포함해서,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이 해맑은 모습으로 즐겁게 살아간다고 믿는다. 물론 어른들에 비하면 아이들은 조금 더 해맑고 조금 더 즐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어린이였을 때의 나는 언제나 필사적이었다. 하다못해 이사한 동네에 놀이터가 없어 옆 동네로 놀이터를 찾아 떠날 때조차 그랬다. 아이들에게도 아이들의 싸움이 있다.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그 사실을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책, <수영장의 냄새>는 내가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기억들 속에 녹아 있던 감정, 감촉이나 냄새까지도 아주 생생하도록. 

 

 주인공인 민선은 다행히 아주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가난하지도 않다. 민선의 이야기에서 민선에게 폭행을 가하는 어른도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맞는 것을 현실과 창작물을 통틀어 별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선의 삶 역시 필사적이다. 인기 있고 예쁜 희영의 눈에 들어야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수영을 해야 하고, 어쩌다 저지른 잘못을 숨겨야만 한다. 어른들은 쉽게 아이들을 바보 같다거나 단순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인기 있고 예쁜, 그래서 힘이 있는 친구의 눈에 들어야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나? 수영이 하기 싫으면 엄마한테 하기 싫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면 안 되나?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될 것을,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야만 하나? 그렇게 말해 버리곤 한다. 하지만 원래 사람은 남의 일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고 쉽게 말하게 되는 법이다. 특히 상대방이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아이라면 더 그렇다. 

 

 어린 시절, 나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희영 비슷한 존재도 되어 보고 민선도 되어 보았던 것 같다. 어느 날은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그 친구들을 전부 다 데려왔더니, 안 그래도 한없이 좁은 우리 집이 꽉 차는 바람에 엄마가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반면, 인기 있고 반의 중심 인물이었던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갔다가, 좋은 생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손가락질을 받은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그 모든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집이 좁아서 친구들과 놀 수 없으면 바깥으로 나가면 된다. 친구에게 비싼 선물을 사 주지 못해도 그게 나의 형편이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그 때 그럴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지금의 내가 그 일들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넘길 수 있는 건, 과거의 내가 그 일들을 직접 몸으로 겪어 보냈기 때문이다. 늘 지나간 일보다는 내가 당장 맞닥뜨려야 하는 일이 더 크게 느껴지니까. 

 

 

 인상적인 장면이 아주 많았지만, 모든 장면을 공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가장 강렬했던 장면을 첨부해 본다. 누군가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익사할 수도 있다는 말이 쿵, 하고 다가왔다. 내게는 너무나 얕아 보이는 물에서도 누군가가 잠겨 죽을 수 있다. 나는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일 때문에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특히 약한 사람들이 더 그렇다. 어리고 약하거나,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거나,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죽어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이들에게도 아이들의 싸움이 있다. 그 싸움을 무시하지 않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얕은 물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책에는 수영장 이야기만 나오는 게 아니지만, <수영장의 냄새>라는 제목은 이 책에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 강습을 받아 본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는 종종 수영장에 가곤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수영장의 소독약 냄새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소독약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고는 하는데, 나는 그 냄새가 별로 좋지 않았고 물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수영장에 간 건 오로지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였다. 그 친구들 중에서는 희영처럼 예쁘거나 잘 생기고, 부모님이 학교에 자주 오고, 공부를 잘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입던 수영복이 작아져 더 이상 수영장에 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새 수영복을 살 여유는 없었으리라.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잘 자라서 어린 시절에 수영을 배우지 못한 것도, 수영장에 많이 가지 못한 것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네가 겪는 일이 별 거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 <수영장의 냄새>는 내 어린 시절에 대해서 돌아보게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내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주기도 하는 책이었다. 

Posted by 김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