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투르게네프의 햄릿과 돈키호테
<햄릿>과 <돈키호테>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고전들이다. 문학사에서 두 작품이 갖는 의미 역시 엄청나지만, 햄릿과 돈키호테라는 두 인물이 각각 특정한 인간상을 대표한다는 점도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햄릿형 인간이라고 하면 교양있고 지적이지만 우유부단한 인간, 돈키호테형 인간이라고 하면 다소 아둔하고 답답하지만 저돌적인 인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 <투르게네프의 햄릿과 돈키호테>의 저자인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가 바로 그 '햄릿형 인간'과 '돈키호테형 인간'의 유형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다.
<돈키호테>라는 작품이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돈키호테의 모험이 그의 망상에 가까운 착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돈키호테를 부정적으로 여기거나 미련하고 멍청하게 그리곤 한다. 그러나 저자 투르게네프는 돈키호테라는 인물을 둘러싼 수많은 편견들에 대해 항변하며 돈키호테형 인간을 변호한다. 돈키호테는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이상이라고 여기는 것에 몸을 던질 줄 아는 인물이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기를 꺼리지 않고, 상상 속의 대상을 향한 것일지언정 누군가를 향해 순수한 사랑을 한다. 저자는 이런 돈키호테가 그저 허무맹랑한 행동과 헛소리를 일삼는 인물로만 취급받는 것은 억울한 처사라고 말한다. 반면 대중적으로 고귀하고 우수에 찬 왕자 같은 이미지인 햄릿은 사실 이기적이고 공허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상상 속 여인에게 목숨도 바칠 수 있는 돈키호테와 달리 햄릿은 그 누구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오필리어라는 연인이 있지만, 어머니의 부정 때문에 여성을 믿지 않는 그는 연인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겹쳐 본다. 결국 햄릿과 오필리어의 관계는 햄릿이 오필리어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이고 끝내 그녀의 아버지를 살해하기까지 함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햄릿이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은 연인뿐이 아니다. 그는 억울하게 살해당한 아버지가 간절하게 복수를 호소함에도 아무런 제대로 된 결단을 하지 못한다. 많은 연구자들은 햄릿이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비극적인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있으며 거기에서 도망치고 싶어할 뿐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스스로가 부서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돈키호테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투르게네프가 무작정 돈키호테형 인간만을 추켜세우고 햄릿형 인간을 폄하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물론 돈키호테를 둘러싼 좋지 않은 시선들 때문에 다소 돈키호테에 대해 호의적으로 분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햄릿과 돈키호테의 공통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중요하다. 일단 그 둘은 모두 이상을 간직한 인간들이다. 여기서의 이상이란 '르네상스의 지고한 이상'으로, 명예와 자유, 아름다움, 정의, 사랑과 같은 가치를 뜻한다. 햄릿 역시 비록 실패했을지언정 이상적인 가치들을 좇아 뒤틀려 버린 것들을 올바르게 맞추려 하는 인물이다. 햄릿과 돈키호테는 모두 슬픈 죽음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좇았던 가치들이 의미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의 의지를 잇고 후세에 전달해 줄 존재, 산초와 호레이쇼가 있다. <햄릿>과 <돈키호테>가 불멸의 고전으로 남은 이유 중 하나는 햄릿, 그리고 돈키호테라는 각각의 인물들이 인간 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세상을 떠난 날이 1616년 4월 23일로 정확히 같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